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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Dec 08. 2019

기억이라는 상대성이론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감상평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연극을 관람한 순간이, 그 앞뒤 사이사이로 얽혀 있는 시간들이 가물가물하다. 한 달여간의 시간동안 기억의 파편들이 날아갔고 뒤섞였다. 연극의 구성,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 은유적인 대사들이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극이 지금 나의 상태와 같은 인간의 기억능력과 기억방식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극의 시간은 뒤틀려 있었고 섞여 있었으며 어딘가 결핍되어 있었다. 연극을 기억하려 애쓰는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연극의 특성들을 떠올려 보니 조금씩 연극의 잔상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커다란 달이 있었고 그것들은 기울어져 경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과 대사들을 던졌고 인과관계와 순서는 엇갈리고 빗나갔다. 시각적인 이미지가 그려지고 나서야 서사가 떠오른다. 살인을 저지른 사건 이후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상처, 속죄의 이야기. 줄거리가 정리되자 청각으로 입력된 대사의 정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여자와 재회하게 된 남자는 모든 순간을 동시에 사는 ‘우주알’을 설명하며 시간을 독특한 독서 방식으로 비유한다. 책을 읽기 전 제본 된 부분을 작두로 잘라내 바닥에 흩뿌린다. 그런 뒤 흩어진 종이를 무작위로 주워 다시 하나의 책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이렇게 진행되는 홍상수의 <자유의언덕>이 떠올랐다. 장강명 작가가 이 영화를 본 것일까?). 이에 여자가 서사가 뒤죽박죽이 된 책에 ‘제대로 된 순서’가 존재할 수 있냐 묻자, 남자는 애초에 ‘제대로 된 순서’ 따위는 존재 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순서가 없는 삶’이라는 화두가 내 머릿속을 휘감았다. 과연 우리의 시간은 뒤죽박죽 석여 존재하는 것일까. 뒤섞인 곡선들일까, 하나의 곧은 일직선일까. 다른 장면으로 극이 전환되었지만 이 시간의 속성에 대한 대사만이 남아 계속 질문들 던졌다. 내가 내린 일종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일직선의 시간을 받아들여 곡선의 상태로 기억을 저장하고 그것을 재배열하여 다시 새로운 직선을 만드는 듯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순서가 존재하는가 하고 묻는 여자의 질문은 처음 사건을 인식하고 기억을 정립하는 과정이고 남자가 말하는 제대로 된 순서가 없는 것은 일차적인 인식 이후에 변형되고 왜곡되고 각자만의 규범으로 정보를 패턴화하는 인간의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하게 되었다. 이처럼 위 장면을 통해 나는 시간의 형태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직선과 곡선, 처음과 끝, 순서와 비순서와 같은 개념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은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시간상을 제시하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작품이 표현하는 일련의 발언들을 상대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특수 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시공간은 고정돼있지 않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우리의 내면, 정신적인 영역에서 또한 작동된다고 생각한다. <그믐>은 이 내면적으로 인식되는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다.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한다. 강한 중력파로 인해 우리가 불변할 것이라 믿던 모든 것들이 뒤틀리게 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예로 블랙홀이 있다. 시공간이 왜곡되어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그믐>이 제시하는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삶에서 강한 중력은 강력한 사건이다. 그것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연극 속 남자의 살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계기로 인해 남자, 여자, 아주머니의 시공간, 그것을 인식하는 기억은 흩어지고 뒤틀리고 산발된다. 그리고 극명한 차로 변형된 각자만의 ‘시간’ 혹은 ‘세계’ 혹은 ‘기억’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기억의 상대성'이 발생된다.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극은 이 내면적 시간의 상대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크기를 지닌 달이라는 연극적 장치로 구성되고 서로 다른 사건의 기억을 묘사하는 인물들의 행동에 의해 전달된다. 이 시간의 상대성이 연극의 갈등요소가 된다. 인물들은 극중 내내 이 상대성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말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 연극이 더욱 훌륭한 까닭은 단지 ‘기억은 상대적이다’라는 인식을 넘어 그렇게 다른 기억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아주머니의 행위에 반항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왜곡된 기억으로 비롯된 것일지라도 남자는 아주머니를 향해 끊임없이 사죄하며 그녀를 존중한다. 그것은 동시에 그녀의 기억과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르게 흘러가는 타인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속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층위를 넘는 속죄 말이다. 


  우리는 이 인물들과 같은 시간을 경유하며 이들과 같이 시간을 대한다. 연극 속 인물들처럼 나는 연극의 기억을 변형시키고 휘발시켰고, 살인 사건이 아니더라고 삶을 흔드는 어떤 ‘사건’들에 의해, 크고 작은 블랙홀들의 중력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 연극은 그 기억의 상대성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또한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삶을 살아가는 힌트를 제공해준다. 기억의 상대성을 인지해야 한다고, 그런 뒤 다른 타자의 기억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p.s. 지극한 사담이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연극의 과한 감정표현과 말투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연극을 관람한 뒤 책을 읽었는데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연극의 주인공들이 정신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해보여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던 반면, 소설 속 인물들은 핍진감 있는 현실에 인물과 같았다. 어떤 표현방식이 좋은지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원작소설이 훨씬 감명 깊었다고 판단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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