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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Dec 21. 2020

창작 예술은  정말 오른쪽 벽에 다다랐을까?

과학과 공진하는 예술, 그 가능성에 대하여

                                                     

1. 서론      


  『풀하우스』에서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연적 진화와 문화적 변화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연의 진화는 멘델의 법칙을 따라 진행된다. 끊임없이 종을 분화하고 진화하며 수많은 시간과 세대에 걸쳐서 비의도적이고 수동적으로 진행된다. 반면 문화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닌 채로 폭발적인 속도로 변화할 수 있다. 문화는 분리되는 자연의 진화와 달리 융합과 접합을 통해 새롭고 강력한 발전을 이륙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 나라의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세대에 걸쳐 습득한 지식과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획득 형질의 유전 메커니즘, 라마르크적 유전 방식을 따른다. 저자는 이와 같은 속도와 방향의 차이는 오른쪽 벽에 영향을 받는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다윈적 과정으로 수동적으로 천천히 진화해나가는 생물의 진화는 풀하우스의 오른쪽 벽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지만 경향성과 빠른 속도를 지니고 발전하는 문화는 자주 오른쪽 벽에 의해 자주 규정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른쪽 벽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중요한 세 가지 문화적 사례의 예시로 과학, 공연예술, 창작예술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아직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기에 오른쪽 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공연예술의 경우에는 오른쪽 벽에 바짝 붙어 있어 향상의 여지가 매우 좁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 분야는 위축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창작 예술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창작 예술은 오로지 새로운 형식을 창안해 내는 사람에게만 그 위대성을 인정하는 혁신의 강령 때문에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빠져있기 때문이다.”(굴드,2002 : 318~319) 새로운 스타일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면 모르겠지만 “세련된 청중들의 감상을 견딜 수 있는 스타일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굴드,2002 : 319). 즉 창작 예술이 오른쪽 벽이라는 형식의 한계의 부딪혔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필자는 창작 예술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혁신의 강령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져있으며 “인간의 신경 작용과 그에 따른 이해 능력에 한계를 고려했을 때 이해 가능한 스타일이 고갈되었다”(굴드,2002 : 320)는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먼저 ‘창작 예술’이라는 정의의 모호함에 대해 살펴보고 창작 예술 과연 혁신의 강령 딜레마에 빠져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과학과 예술은 독립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호작용하며 공진해나가는 관계로 바라보며 그 근거들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변화하는 과학과 예술의 전망을 살펴보며 창작예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창작 예술과 그 수용자에 대한 정의      


  창작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예술가들은 답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정체성이 담긴 독창적이고 새로운 창작물과 예술관을 창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평론가들은 혁신적인 작품에 호평을 남기며 대중들은 관습을 깨고 나온 새로운 장르에 열광한다. 저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작 예술계의 특성을 ‘혁신의 강령에 집착적으로 매달려 있다’고 진단하며 부정적인 시선을 취한다. 창작 예술이 오른쪽 벽에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쥐어짜려한다는 논조이다. 하지만 이러한 굴드의 주장에는 많은 오류와 한계가 존재한다. 용어의 정의에서부터 그 부실성이 드러난다. 과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창작 예술’의 정의는 무엇인가?       


  ‘창작 예술’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다양한 예술 분야의 상위개념이다. 하지만 『풀하우스』에서 저자는 ‘창작 예술’이라는 범주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밝히지 않으며 의미의 범위를 구분내리지 않고 있다. 제대로 규정되지 않은 저자의 정의로는 음악, 미술, 사진, 영화, 무용, 건축 등 수많은 분야의 개별적인 특성과 특징들을 제대로 고려할 수 없다. 범위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창작 예술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수용자들의 범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묘사한다. 창작 예술에 새로운 혁신 강령을 요구하는 예술의 수용자는 일반 대중들이 될 수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평론가가 될 수도,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주 세련된 청중들”, “지적이고 나름대로 이해력도 갖추고 있는 아마추어 청중들”(굴드, 2002 : 319)과 같이 주관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며 창작 예술의 수용자들을 한정한다. 이처럼 폭넓은 의미로 지칭되고 그 세부 분야가 복잡화된 ‘창작’과 ‘예술’이라는 단어와 예술의 수용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창작 예술의 특성과 한계를 제대로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을 정의하는 많은 담론들과 분야들의 특질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일반화하고 통합화하는 것은 저자가 앞 장에서 비판했던 환원주의적 태도다.      


  하지만 굴드의 주장에 있어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한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분류는 저자가 창작 예술의 가능성이라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암막 커튼처럼 작용한다. 필자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지우고 둘이 함께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던 과정들을 제시하며 창작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전망해 볼 것이다. 또한 ‘창작예술’에 국한되지 않으며 저자가 분류한 ‘공연 예술’ 또한 분야에 따라 한계에 근접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창작 예술’ 대신 ‘예술’이라는 단어로 그 가능성의 지칭범위를 넓혀 사용하고자 한다.     


3. 공진하는 과학과 예술     


  과학과 예술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둘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얽혀 있다. 과학과 예술은 공통된 지향점을 가진 서로 다른 언어다. 두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와 법칙, 진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그 방법의 차이에 대해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본인의 저서 『뉴턴의 아틀리에』에서 이와 같이 묘사한다. “물리는 미술이다. (중략)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공간적 구조를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화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과학이다. 관측 결과를 구조화하여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것. 물론 물리와 미술은 다르다. 물리와 미술 모두 질문이 중요하지만, 물리가 답이 있는 질문을 다룬다면 미술은 답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리의 상상이 올바른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미술의 상상은 질문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김상욱,2020 : 5). 여기서 물리는 과학으로, 미술은 예술로 치환 될 수 있다. 과학은 체계적이고 정확한 숫자와 값들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론들을 발견한다. 과학은 세상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원자를 발견했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방정식으로 표현해냈다. 미지의 우주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탄생했는지, 생명체들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답들을 찾아냈다. 물론 이러한 답들은 새로운 연구를 통해 계속해서 개정되고 재인식 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를 통해 인간들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들과 작동 법칙을 발견하며 인식과 사유의 폭을 넓혀갔다. 예술 또한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리를 탐구한다.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시각 정보들의 세밀한 질감을 찾아내고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를 그려보며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술의 방식에서 과학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명확한 이론이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답이 아닌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각자의 해석을 요구한다. 질문으로 비롯된 의문을 통해 개개인은 각자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4. 과학과 예술, 상호작용의 기록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원리와 진리를 찾아간다는 공통된 지향점을 지녔기에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언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과학과 예술을 구분해서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 먼 우주의 별들의 존재와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 연극을 보며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과학, 수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현대의 서사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학』을 저술하였다.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에도 과학과 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당대 최신 기하학, 과학이론을 사용하여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건축가 브루넬리스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학 공식들과 건축공법을 사용해 거대한 돔을 지닌 두오모 성당을 만들었다. ‘르네상스맨’이라고도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학을 공부하며 인체의 신체를 보다 정확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기며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물들을 탄생시켰다. 과학 또한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어릴 적 아카데미에서 배운 원근법과 같은 미술 지식을 바탕으로 달 표면의 세밀한 명암을 관찰함으로써 달의 산과 계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뉴턴은 흰색과 검은색을 섞어서는 유채색을 만들 수 없다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색채 이론에 영향을 받아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데카르트의 색채 이론을 뛰어넘은 독창적인 이론을 발전”(홍성욱,2005: 19) 시킬 수 있었다.      


  함께 성장해오던 예술과 과학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차 산업혁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초 무렵부터이다. “19세기부터 자동 기록 기기나 사진과 같은 기계가 과학에 사용되면서 과학의 특성으로 ‘기계적 객관성’이 부상”(홍성욱,2005: 9)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과학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 예술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구분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예술과 과학을 양립될 수 없는 길항적인 관계로 인식했다.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 유지되었던 문과/이과 분리 정책을 보자면 과학과 예술을 분리하고자 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다.) 19세기에도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팽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이 정해놓은 사회적 관점과 상관없이 과학과 예술은 상호작용을 지속하고 있었다. 예술계로부터 비판받았던 사진이라는 매체는 미술계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며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사조 탄생에 영향을 주었고 동시에 사진이라는 새로운 예술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영상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분야가 만들어지며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게 된다. 기술은 이처럼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만들어냈다. 이 의미는 단지 하나의 분야를 만들어낸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예술 장르는 수많은 미학과 스타일을 잠재하고 있기에 예술 발전에 있어 과학기술의 기여도와 영향력은 수치화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     

 

5.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더니즘     


  20세기에 이르러서 예술과 과학의 멀어졌던 간극은 다시 좁혀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과학, 예술 각각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과학 분야에서는 1900년대 초반,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을 흔든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예술을 비롯한 역사, 정치, 사회계에서는 이성중심주의의 모더니즘을 탈피하기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담론으로 떠올랐다. 예술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미술을 대표하는 뒤샹이 그 유명한 작품 <샘>을 전시회에 출품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 속에서 예술과 표현의 영역을 넓혀갔다.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혁신적인 특이점이었다. 이 과학이론과 예술사상은 모두 ‘관찰자의 중요성’이라는 철학적인 공통점을 지닌다. 상자들 열어 관찰하기 전에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어떤 상태로 존재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의 모더니즘과 달리 미술품은 의미가 압축된 하나의 고정된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가 보는 순간 일어나는 자신만의 해석을 경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같이 확정된 것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과 예술은 단지 물리적인 실체나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영역에서 까지 서로의 특성을 주고받는다.      


6. 앞으로의 가능성     


  과학과 예술은 이처럼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외연을 확장시켜왔다. 그리고 영역 확장과 혁신의 가능성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변화하는 시대는 새로운 담론과 기술, 스타일과 장르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왔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은 이미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술이 된 동시에 다양한 광고, 영상, 영화와 그 외의 다양한 예술 분야에 새로운 영역을 형성시켰다. 대표적으로 방송계에서 콘텐츠에 가상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올해 MBC에서 제작한 ‘VR휴먼 다큐멘터리’에서는 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의 모습을 VR기술로 재현해 엄마와의 재회를 만들어내며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M NET 에서는 ‘AI 음악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세상을 떠난 가수들을 무대 위로 다시 소환시키기도 했다. 공연적인 부분에서도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형식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저자가 주장한 ‘공연예술’의 구분에 있어서도 비약을 발견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내고 있는 또 하나의 담론은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 딥 러닝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가며 인간의 가능성과 실존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아직 인간의 사고력과 창조성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빠른 학습 능력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도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는데 있어 많은 의견들이 논의되고  있다. “예술은 인간의 희로애락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상념 등이 묻어있으며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소통 가능한 고유한 미가 존재한다”(강민석,2020: 128)는 입장과 “인간의 무의식을 기술적 도움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보여준다”(최병학,2018: 294)는 의견이 공존한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19세기 근대에서 그러했듯이 과학과 예술의 관계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평가와는 상관없이 둘은 항상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움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기술에 발전에 따른 새로운 예술 장르와 새로운 미학들이 존속할 수도 소멸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시대의 기술발전과 담론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이라는 것이다.     

7. 결론      


  예술(art)의 어원은 라틴어 ars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ars는 헬라어로 기술을 뜻하는 techne에서 파생된 어원이다. 이처럼 예술이라는 단어의 근원에는 기술이 함께하고 있다. 과학은 이러한 기술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킨다. 과학기술이라는 안경은 예술에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의 새로운 부분을 비춰준다. 예술은 새로 얻게 된 시야를 통해 사고하고 사유하며 새로운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해간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올라프 스테이플던의 소설 <스타메이커>에서 탄생한 다중우주의 개념이 과학이론으로 발전했듯이 예술이 우리 세계에 던지는 다양한 종류의 질문들은 과학적인 답을 규명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스티브 제이 굴드는 『풀하우스』의 ‘창작예술’의 정의와 마지막 장에서 앞서 언급했던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엄청나게 다양한 성질과 특질을 지닌 예술 분야들을 고려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의 사례만을 예시로 들어 창작 예술의 성격을 일반화하였고 창작예술을 평가하는 다양한 형태의 수용자를 고려하지 못했다. 보다 근본적인 논거의 오류는 과학과 예술을 분류하여 범주화했다는 것에 있다. 필자는 이러한 오류에 대해 과학과 예술이 공진하며 발전해온 역사를 살펴보며 상호작용하는 두 분야의 관계를 짚어봤다. 그 관계를 통해 기술적인 부분과 동시에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부분까지 조응하는 두 분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분야의 영향은 사회적인 시선과 관념과 상관없이 꾸준히 이어져왔고 지금, 여기에서 진행 중에 있다. 굴드는 문화적 변화가 자연 진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를 설명하며 ‘위상기하학’의 개념을 제시한다. 세대를 반복하며 융합되지 않고 떨어지며 넓게 퍼져가는 생태학적 특성과 달리 문화는 시공간을 초월해 융합, 접합 되며 상승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관계가 그러하다. 과학과 예술은 융합되고 접합되고 공진하며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세계의 무궁무진한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스티브 제이 굴드 (2002). 『풀하우스』. 사이언스 북스. 303 - 323

김상욱, 유지원 (2020). 『뉴턴의 아틀리에』. 민음사. 5     

임경순 (2018). 과학기술 혁신과 예술. 한국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 9-19     

홍성욱 (2005). 과학과 예술 : 그 수렴과 접점을 위한 시론. 과학기술학연구, 5(1), 1-30     

Daston, Lorraine and Peter Galison (1992), “The Image of Objectivity”, representations, Vol.49, pp. 81-128 – 홍성욱 (2005). 9페이지 재인용      

Edgerton, Samuel Y. (1984), “Galileo, Florentine ‘Disegno’ and the ‘Strange Spottednesse’ of the Moon”, Art Journal 44; 225 ~ 232 – 홍성욱 (2005). 19페이지 재인용     

최병학 (2018). 포스트휴먼 시대의 예술. 철학논총, 92, 283-301     

강민석, 주종우 (2020). 4차 산업 혁명 시대에서 인공지능(AI)의 작품 창작에 관한 연구 - 예술인들의 인식을 중심으로 -.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1(1), 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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