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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리아 Dec 30. 2020

딱 두시간, 워싱턴

두 번의 식사, 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나니 워싱턴에 도착했다. 


약 14시간의 비행이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수요일 오후. 공중에서 증발해버린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잃어버린 양말 한 짝, 귀걸이 한 짝 같은 것들이 모여 산다는 행성이 있다던데, 뭐 그런 곳에 사라진 시간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건가. 문과 같은 생각만 하다가 문송해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곳곳에 쉽게 보이는 픽업트럭과 널찍널찍한 단층 건물들을 보니 미국에 온 게 실감 났다. 외국에 오면 낯선 공간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이 있다. 미국의 경우는 거대한 온실이다. 18년 10월에 왔을 때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정돈된 공기의 느낌. 너무 건조하지도 않고, 너무 습하지도 않은. 적당한 볕은 식물처럼 인간들도 잘 키워낼 것만 같았다. 오랜 비행으로 멍멍한 귀, 퉁퉁 부은 몸 때문에 상쾌하고 탁 트인 느낌보단 거대한 온실의 유리천장처럼 무언가에 씌워진 느낌.  긍정적 의미의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워싱턴 한복판 숙소에 짐을 내려두니 7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사전에 계획한 대로라면 뭔가를 먹어야 했다. 1박 3일, 짧은 출장이었기에 워싱턴에 온 기분을 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이곳도 해가 제법 길어져 바깥은 여전히 환했다. 용기를 내서 호텔 주변을 돌기로 했다.




미국에 가면 꼭 하고 싶었던 일. 빳빳한 베이컨을 손으로 집어먹기. 그건 지난번 미국에 왔을 때 원 없이 해봤다. 이번에 미국에 오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은 멕시코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푸드트럭의 멕시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아보카도를 1/4 정도 넣은 새 모이 같은 과카몰리 말고, 아보카도를 듬뿍 넣은 청키한 과카몰리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머무는 워싱턴은 너무 반듯하고 정리된 곳이었다. 푸드 트럭은커녕, 정차한 차도 거의 없었다.


구글링을 해보니 괜찮은 멕시코 음식점이 몇 개 보였다. 걸어서 16분. 과연 내가 걸어서 16분을 갈 수 있을까? 홀로 여행을 왔다면 충분히 가고도 남았을 테지만 난 지금 출장 중. 길을 잃거나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회사에 피해를 줄 수 있단 생각에 금세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걸어서 6분 거리에 타코 집이 있었지만 평이 좋지 않았다. 아, 고민이로다. 멕시칸을 포기할 것인가 아님 별로인 타코를 미국 바이브에 버무려 그냥 먹을 것인가. 


일단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호텔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7시니까, 9시까지 숙소로 돌아오는 게 목표였다. 내가 가진 건 딱 두시간의 워싱턴. 평이 별로인 타코집을 지나 조금 용기를 내 더 걸으니 미리 알아보고 온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타코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이 집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애초 목표였다. 늘 그렇듯 애초 목표대로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대게 그렇다. 흘러가는 대로, 상황에 맞는 대로, 되는 대로. 


이번에도 그랬다. 나에게 주어진 두 시간뿐이었기에 되는대로 아이스크림 바로 옆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양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양고기 파스타를 주문했다. 도무지 해석불가인 식재료를 읽으며 식은땀을 흘리던 도중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메뉴였다. 너무 싸지도, 너무 비싸지도 않은 가격이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도 옜다 기분이다,라고 생각하며 한 잔 주문했다. 


홀로 바에 앉아 조금씩 저무는 날을 지켜봤다. 여의도 같기도 하고 광화문 같기도 한 이곳.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쳐 보였다. 전 세계 직장인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 내 테이블을 담당하는 직원은 중간중간 영어로 음식은 만족스러운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따위를 물어왔다. 팁을 많이 받는 곳이군,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옆 가게에서 과일 맛 크런치를 올린 밀크 아이스크림을 사서 호텔로 향했다. 어둑어둑 해지는 워싱턴 거리를 맛없고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었다. 결국 아이스크림은 반도 못 먹고 쓰레기통으로. 묵직한 아이스크림이 쓰레기통으로 훅, 빨려 들어가자 놀란 쥐가 쓰레기통 사이에서 튀어나와 워싱턴 거리를 달렸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창밖을 보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바삐 퇴근하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난 거리. 창밖으로 왜소증이 있어 보이는 한 남자가 오래도록 구걸을 했다. 구걸하는 남자에게 다가가 간단한 대화를 하는 사람, 그를 못본척 에둘러 걸어가는 사람, 눈은 마주치지 않고 지폐를 건네는 사람. 


풍경을 잠시간 바라보다 커튼을 닫았다. 워싱턴 두 시간의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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