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 슬럼프 극복기
2년 전, 나는 직장 내 왕따, 시들어가는 내 외모에 대한 불만,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 외로움, 과거에 비교해서 비참해진 나 자신 등의 이유로 매일 같이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것들을 시도해보았다. 요가, 유명한 스님과의 상담, 시크릿 카페 가입 및 상담, 사이비 종교인들과의 논쟁,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봉쇄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와의 만남, 온갖 뉴에이지 서적 탐독, 박수무당 및 무당과의 영적상담 등 정말로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고, 끝없는 고통의 사슬을 얼른 끊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부질없었다. 오히려 나의 약해진 마음을 이용해서 본인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외부에서 답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고통은 점점 심화되어 갔다. 더 이상 외부에서 답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딱 3개월만 현재에 집중하고 그래도 내 인생에 변화가 없으면 자살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에서 답을 얻는 것을 단념하고 지금 현 상황에 집중하자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인간관계, 외모, 업무 능력, 성격 등 나의 모든 부분들이 바뀌었다. 우울, 자살충동 같은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 톨레 작가님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내가 힘든 시기에, 빨리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뉴에이지 종교 서적들과(나의 흑역사 책 '시크릿'과 같은...ㅎㅎ) 함께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변화는 없었다. 그 당시에 난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시크릿에 나오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류의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소원을 쓴다고 내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도 그런 마음으로 읽었고, 현재에 집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어 중간에 읽다가 그만두었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개소리,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미래와 과거에 사로잡혀 있던 나로서는 이런 심오한 내용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2년 후, 정말 뜬금없이 이 책이 떠올랐고 다시 읽어보았다. 깜짝 놀랐다. 당시에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대부분 이해가 되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느낌, 온몸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랄까... 이 책을 읽고 '뭔 개소리야'라고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책 내용에 대한 내 나름의 경험에 기반한 해석을 붙이고자 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니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ㅎㅎ
"어떠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과거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떠한 일도 미래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미래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 자신을 관찰해보면, 하루 종일 과거에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미래에 있을 일을 기대하거나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지난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에 있을 일을 기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지금 1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후회하고 있다면, 1년이 지난 뒤에도 1년 전(지금)을 후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게 되면 현재의 즐거움과 수많은 기회들을 놓치게 된다.
4년 전 군에 복무할 당시,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바람을 피운 건 6개월 뒤 알게 되었다...) 바보처럼 매일 밤,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내가 잘해줬더라면 달라졌을 텐데'하면서 온갖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나 자신을 괴롭혔고, 그 당시의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과 기회들을 놓쳤다.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결함을 지닌 것이란 사실만 이해하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광기를 연구한다고 해서 멀쩡한 정신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죠. 에고는 항상 거짓된 자의식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뭔가를 필요로 하며, 문제가 있으면 쉽사리 거기에 들러붙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민거리를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라도 되는 양 취급하곤 합니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벗어난다는 것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과거 여자 친구와의 기억들을 회상하는 행위는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고, 내 일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내가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찾다가, 어느 순간 생각과 감정에 중독이 되었다. 슬픔과 외로움의 감정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해결책이 나올 것만 같았고, 슬픔과 외로움을 증폭시켜주는 과거의 기억에 계속 나를 맡기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자 슬픔과 외로움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휴가를 나가도,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현실 도피를 위해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면서, 여자 친구에게 차인 불쌍한 군인이라는 내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이 상황들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자고 해도 만나지 않았고, 새로운 좋은 인연이 찾아와도 회피했다. 나도 모르게 불쌍하고 외로운 이미지를 가진 에고(거짓된 자아)에 중독된 것이다.
에고(거짓된 자아)는 과거나 미래의 생각을 먹고 자란다. 내가 과거를 회상하면 할수록 에고(거짓된 자아)의 힘은 커져갔다. 문득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행위를 멈추려고 해 보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에고의 소멸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에고에게 먹이를 계속 주었다.
당신의 마음이 '불쾌하다'든가 '못마땅하다;'는 이름표를 어떻게 붙이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십시오. 이처럼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가, 그칠 줄 모르고 판단을 계속하는 행위가 고통과 불행을 창조합니다.
우리는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이름을 붙인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 상황에 대한 판단도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 상황이 나쁘거나 좋거나... 그 당시의 나는 내 상황을 최악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돼버렸다.
에고는 온전함을 찾아 헤맨다. 에고의 마음에 내재하는 감정적인 고통의 한편에는 불완전함이나 결핍에 대한 감각이 온전하지 않다는 감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의식하는 이들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거나 충분치 못하다고 느끼면서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에고는 자아를 느끼려고 하는 마음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자신을 외부에 있는 것들과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죽음이 임박해 올 무렵이면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내고 말 테니까요. 삶의 비밀은 '죽기 전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 학교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남들보다 좀 더 낫기 위해 등등 끊임없이 미래에 가치를 둔다. 어릴 적에 공부를 왜 하는지 궁금해서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왜 하냐.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대학 가면 좋은데 취직하고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니깐 좋지!' 마음 한 켠이 불편했지만, 존경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이기에 그냥 따랐다. 공부, 체육, 음악 등 모든 지 잘하기 위해, 조금 더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들이 말하는 미래의 행복을 좇았다. 끊임없이 현재의 불완전한 나에게 불만을 가지면서 미래를 향해 달렸다. 원하던 목표를 성취하면 기쁨은 잠시였고, 다시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오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다.
학교라는 번듯한 직장이 있음에도, 이제 막 군대를 전역해서 자유를 누리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난 과거와 미래에 집착했다. SNS를 보면서 나보다 못났던 친구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질투했고, 현재의 나 자신을 비관했다. 스트레스로 망가진 내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못생겨진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을 내렸다. 친구들이 망가진 나의 모습을 보면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부정적인 현실들을 끌어왔고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었다.
1년 동안 폐인처럼 집-직장-PC방을 돌았다. 현실도피를 위해 하루에 8시간 이상 게임을 했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업무 능력도 엉망이었다. 직장 동료,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만나기 싫었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잔소리만 늘어놓는 가족들이 싫었다. 명절 때, 부모님 집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밥을 굶으면서, 자살을 생각했다. 자살만 수천 번 생각했고, 밤에 잠도 거의 못 잤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머나먼 전생의 기억 같네.. ㅎㅎㅎ)
어느 순간, 나는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나는 누구인가?', '과거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인기 많았던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러한 나를 관찰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들이 나일까?'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에 피어 있는 꽃, 울창한 나무, 맑은 공기,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 등등 평소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던 모든 것들이 신비롭게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극한의 고통을 겪자 그것을 견디다 못한 에고의 일부가 그때 소멸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과거, 나의 생각, 현재의 인간관계들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죽기보다 더하겠냐?'라는 생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니 놀라운 일들이 펼쳐졌다.
'지금 이 순간'에 살면서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를 방문하도록 하십시오. ...(중략)... 마음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훌륭한 도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살라'는 말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수단'일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즉시 다시 지금의 순간으로 돌아오십시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항상 '지금'에 주목하면서 시간을 주변 장치로 인식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심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롭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지금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고 있다면, 당신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떠나지 못한 채 자기를 비판하고 저주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실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늪에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 마음의 특성상, 에고는 끊임없는 대상을 찾아서 나와 동일시한다. 과거와 미래는 에고의 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관찰사 시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이다. 마치 게임의 캐릭터를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게임 캐릭터를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캐릭터가 고난을 겪더라도, 그 고통 속에 빠지지 않고 우리는 즉각 해결책을 찾아낸다. 캐릭터의 고난의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게임을 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퀘스트를 못 꺠도 괜찮다. 그냥 게임을 한다는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현재에 집중하기이다. 이는 현재의 즐거움, 쾌락에 집중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미래에 작가가 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해서 억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오로지 지금 글을 쓰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의 촉감, 타자 소리, 글을 보고 있는 시각, 균일하게 이뤄지는 나의 호흡 등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지금 현재 집중해서 세운다. 머나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크릿'처럼 기대하거나 확신하지 않는다. 미래는 예측불가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면, 당신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지만, 바로 이 순간 내딛는 발걸음을 존중하고 거기에 최대한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때, 목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미래의 행복이라거나 성취감, 자기만족을 너무 의식하게 되면,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단지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로 축소되고 말 겁니다. 그러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심리적인 시간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더 이상 모험이 아니라, 달성하고 해내야 하는 강박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볼 수도 없고, 그 향기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써 맛보게 될 삶의 기적과 아름다움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학창 시절에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내신 성적을 잘 받고 수능을 잘 쳐야 했고, 내 머릿속은 온통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외식을 할 때에도, 친구들과 농구를 할 때에도, 오랜만에 가족들과 여행을 가서도 온통 미래에 대한 계획과 걱정뿐이었다. 그 당시 난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살면서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한 삶이고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가서도, '운동을 해서 체력을 늘려야지. 아! 오늘 저녁에 인강을 얼마나 들을까?' 생각은 했지, 주변에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 동물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지금'은 나에게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시간 속에 구원은 없습니다. 당신은 미래에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현존이 자유를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오로지 지금 자유로울 수 있을 뿐입니다. ...(중략)...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문제를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뭔가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이지만, 동시에 미친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성적을 얻어도, 내가 바라던 취직을 해도 그때 그 순간 잠시 기분이 좋을 뿐, 내 마음은 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뭔가 해야만 할 거 같았고, 남들보다 뛰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Sns를 통해 남들과 비교를 하면서, 내가 남들보다 못난 거 같으면 비참해하고 또 잘난다 싶으면 교만해했다. '관찰자 시점'을 통해 내 행동을 바라보고 난 큰 충격을 받았고, 더 이상 과거와 미래(시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
행동의 결과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행위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 열매는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중략) 성공이나 실패는 내면의 존재 상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삶의 상황 밑바닥을 흐르는 삶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목표나 사물, 사람 등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생각 90% 이상은 걱정, 불안 등 현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이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는 '나'이고, 내가 성공을 하더라도 나는 그냥 '나'이다.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성공을 하더라도 우쭐해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존재'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온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일이 잘 안 풀려도 괜찮다. 사소한 오해가 생겨 갑자기 친구관계가 나빠져도 괜찮다. 어제 시험 결과가 나쁘게 나와도 괜찮다. 공부를 하는데 너무 힘들어도 괜찮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실패가 있으면 성공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고통조차도 즐긴다. 마치 아이들이 밖의 운동장에서 체력이 다해서 힘듦에도 불구하고 즐거우니깐 계속 뛰노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내 존재라는 평온함 속에서 이 모든 걸 즐기는 것이다.
내맡김은 삶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단순하면서 심오한 지혜입니다. 당신의 삶의 흐름을 경험하는 유일한 장소는 '지금'이므로, 내맡김이란 지금의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내면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다.
처음에 '내맡김'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진짜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내 귀에 내맡김이라는 단어는 '포기', '단념'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죽고 싶고 너무 힘든데 내맡김이라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지. 내맡긴다고 상황이 달라지나.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하지만 '내맡김' 혹은 '내려놓기'는 포기나 단념과는 다른 의미이다. 내맡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을 뜻한다. 상황에 대한 판단 없이, 지금 현재 있는 상황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하루에 게임을 8시간 넘게 하고, 친구도 안 만나며, 피부도 안 좋으며, 직장 내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의 현실도피 행위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실제로도 난 그 당시, 현재의 나를 정말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게임을 현실도피용으로 사용했다.
반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면 현재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멋대로 상황을 판단해버린 바람에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상황을 변화시키는 핵심 열쇠 또한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들이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그동안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색해서 연락이 안 오는 것은 아닐까?', '업무에 집중 안 하고 맨날 멍 때리니깐 직장 동료들이 싫어할만하지.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환경 설정을 해야 할까?'
나 스스로를 내맡기고 인정하자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고, 더 이상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던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었다. 슬럼프 이전의 나의 해결 방식은 항상 주변과 비교해서, 타인이 나의 에고를 위협하면 발끈해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팍팍 받아가면서 상황을 개선시키려고 억지로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타인을 이기고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켜도 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슬럼프 이후의 나의 해결 방식은 전과 비교해 정말 달라졌다. 일단 슬럼프 이전의 문제들은 더 이상 나에게 문제가 아니다. '남들보다 좀 못나면 어때?', '내 친구들보다 좀 돈을 못 벌면 어때? 돈 잘 버는 친구들은 축하해줘야지.', '피부에 여드름이 좀 많이 났네! 뭐 좀 지나고 나면 사라지겠지! 수면이랑 식습관 한 번 체크해봐야겠다.'
마음에 저항이 없으니, 전보다 일처리도 3~4배 빠르고 인간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나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기 위해, 70% 이상의 비중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했으나, 이젠 듣는 게 더 좋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공감해주고 도와주는 게 더 좋다.
글을 쓰다 보니 무슨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도인처럼 글을 써놨는데, 사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ㅎㅎ... 여전히 SNS 상에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질투하기도 하고 별 거 아닌 거에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실수도 굉장히 많이 한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난 이 모든 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 안의 에고가 갑자기 날뛰더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고 지금의 내 상태를 '인정'하면 어느 순간 에고는 힘을 잃는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의 짧은 식견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