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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ul 13. 2020

우리 반 아이가 여자친구에게 차였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우리 아이,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데, 오늘따라 유독 표정이 안 좋은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원태(가명)였다.


원태가 축 쳐져 있는 이유를 주변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얼마 전에 여자친구에게 차였다고 한다. 그것도 작년에 수십 번 고백해서 겨우 사귄 여자친구인데 사귄 지 1달도 안 돼서 차였다고 한다. 풀이 죽어 있을 만했다. 원태는 마치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이별의 아픔을 만끽하고 있었다.


의기소침해 있는 원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선생님: 원태야, 괜찮냐? ㅋㅋㅋㅋㅋㅋ

    

웃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원태가 하는 행동이 너무 귀엽고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옛날 초등학교 때의 나의 모습도 생각이 나고 말이다. 다들 학창 시절에 지금의 원태와 같은 그런 시절이 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 시전할 그런 풋풋한 추억들 말이다. ㅋㅋ


나의 웃음에 약간 화났다는 듯이 원태가 시크하게 말했다.

원태: 선생님, 괜찮을 리가 있어요? 하... (한숨을 내쉬며) 선생님 저는 진짜 제가 생각해도 별로인 거 같아요. 전 쓰레기인 거 같아요. 얼굴도 못 생기고 공부도 못 하고 스타일도 별로고...  하...


하... 웃으면 안 되는데 계속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아이들도 킥킥거린다.

선생님, 아이들: 키키킥....(웃음을 애써 참으며)
원태: 선생님, 경고할게요. 웃지 마세요! 너희들도 웃지 마! 저 오늘 심각합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화내는데도 뭔가 웃긴 이 아이는... ㅎㅎ)


원태는 또 어디서 배워왔는지, 이마에 깍지를 끼고 한숨을 내쉬며 드라마에서 볼 법한 실연당한 남자의 포즈를 취했다. 평소에 엄청 유쾌한 성격이라서 본인 나름대로 아픔을 개그로 승화하고 있지만, 아마 마음속에 상처는 남아 있을 터. 어른인 우리가 보기에는 별 거 아닌 일인 것 같지만,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느낌일 것이다. 계속 놀리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위로해줘야겠다!'


사실 아이에게 어른의 입장에서 나중에 가면 다 별 거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줄 거라느니, 지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여자친구 많이 생길 거라느니 하는 식의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감만 든다.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엄마가 그런 식으로 위로할 때 반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의 입장에서 말하는 대신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원태야, 선생님 6학년 때 고백했다 차인 썰 한 번 들어볼래?




나에게는 슬픈 이야기니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나는 초3 때부터 중3 때까지 7년을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도 예뻤다. '허영지'.(와이프야 미안...ㅎㅎ)

좋아한 계기는 없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좋았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영지와 우연히도 동선들이 자주 겹쳤다. 같은 영어학원, 수학학원, 같은 동아리(방송부), 같은 오케스트라 등 내가 운명이라고 느낄 만큼 우리는 비슷한 점들이 많았다. 수학학원에서 수학을 못 하는 영지와 같이 집에 가기 위해서, 일부러 수학 문제를 틀리기도 했다. 방송부에서는 내 당번 날이 아닌데도, 영지의 당번 날에 온갖 핑계를 대고 같이 방송을 했다.


영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점점 커졌고, 6학년 2학기가 되어서 나의 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면 영영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찌질했다. 당시 유행하던 메신저인 '버디버디'로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직접 말할 용기도 없던 나이기에 찌질하게 메신저 쪽지로 무려 4년이나 짝사랑하던 여사친에게 고백을 했다.




반 아이들: 아...... 쌤..... ㅠㅠㅠㅠㅠㅠㅠㅠ

옆에서 듣고 있던 반 아이들 전부가 이구동성으로 탄식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원태가 말했다.

원태: 선생님. 선생님 6학년 때 진짜 핵찌질이었네요. ㅋㅋㅋㅋㅋㅋ  
선생님: 이놈의 시키가. 어디서 선생님한테! ㅋㅋㅋㅋ(웃음)

나를 놀리는 원태에게 꿀밤을 날렸다.


원태: 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딱 봐도 차였네 ㅋㅋㅋㅋㅋㅋ

반 아이들 전부가 궁금해했다.




원태의 말대로 난 보기 좋게 차였다.

'00아. 안될 거 같아. 우리는 지금 연애를 할 때가 아니야. 우리는 지금 공부를 해야 할 나이야. 연애를 하면 공부할 시간이 없잖아.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가서 그때 인연이 된다면 사귀자! 정말 미안해. 그래도 좋아해 줘서 고마워.' 라는 영지의 쪽지와 함께....


4년 간의 짝사랑을 응축한 나의 고백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그날 밤, 찌질하게 이불속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 원태야, 지금 쌤 봐봐. 예전엔 그렇게 찌질했어도 지금은 예쁜 아내 만나서 잘 살고 있잖아. 너도 할 수 있어 인마. 그리고 네가 못난 게 뭐가 있냐? 어! 일단 웃기지, 생긴 것도 그만하면 됐고, 성격 좋지, 공부는 음.... 그래 공부는 지금부터 하면 되는 거고!


자! 그럼 10년 뒤 원태의 여자친구를 위해, 사회책 110쪽 폅시다!


원태: 선생님! 이러기 있습니까? 또 재미있는 얘기 해주세요!!!
선생님: 너 하는 거 봐서. 일단 수업에 집중하자!


아까까지 울상이었던 원태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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