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학부모 상담 때 대화 주제는 '학교 적응, 교우관계, 학습태도, 성적, 학원, 진로' 등이다. 대부분 대화 내용의 초점은 아이에게 맞추어져 있다. 나는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이 시선을 학부모님에게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학기 학부모 상담 때부터는 학부모님들의 살아온 얘기나 '인생관', '가치관'도 묻기 시작했다.
아마 다들 이런 생각을 하실 것 같다. '아이를 위한 학부모 상담에서 학부모의 인생관 얘기라니... 뭔가 좀 이상한데?'
내가 학부모님들에게 그들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을 물어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부모님의 가치관을 통해 현재 아이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는 생존 시스템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부모를 모방하고 따라 한다. 아이는 부모의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다. 둘째, 학부모들과의 소통이 좀 더 원활해진다. 학부모님들마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기에 가치관도 다르다. 이분들의 각자 가치관을 이해하고 있으면, 향후 지속적인 소통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셋째,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난 아직 부모님이 되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솔직히 이분들의 마음에 100% 공감을 하기가 힘들다. 경청을 통해 최대한 이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대화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한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 내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
때문에 나는 학부모 상담을 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적게는 30분, 많게는 5시간까지 상담한 적이 있다. 상담을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되지만 그래도 뿌듯하다. 학부모 상담이라는 시간을 통해,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분 자녀를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학부모님들과 격의 없이 편안하게 상담을 진행했다. 마지막에 오신 학부모님은 준호(가명) 어머니였다. 준호 어머니는 1학기 때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바쁘셔서 상담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준호 생활지도 때문에 몇 번 전화로 통화한 적은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1학기 때 찾아뵜어야 했는데, 이제야 찾아뵙네요. 준호가 요새 학교 가는 것을 엄청 좋아해요! 그리고 준호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해요. 롤모델이 선생님이에요!"
시작부터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ㅎㅎ 준호 어머니와 준호의 학교 생활태도부터 시작해서 교우관계, 진로문제까지 다양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중3인 준호 누나에 대한 특목고 진학 상담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특목고 출신이다 보니 여쭤보신 것 같다. 내가 아는 범위 한에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드렸다.
어느새 상담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났고, 상담 주제는 준호와 준호 누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교사인 나의 인생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참 신기해요. 이렇게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서까지 상담도 해주시고, 수업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활동들도 하시고, 가끔씩 주말에도 아이들이랑 놀아주시고... 선생님을 보면 일과 삶의 경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 힘드실 텐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죠?"
"(고민 중) 흠... 일단 저는 제 사명을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답은 없잖아요? ㅎㅎ 작년 슬럼프 이후로 저는 제 삶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을 느꼈고, 저 스스로 이와 같은 삶의 목적을 정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운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껴요. 지금 준호 어머니를 상담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아이와 부모님의 성장을 도우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지금도 행복합니다. 상담으로 밤새도 저는 괜찮습니다 ㅎㅎ 물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마치 힘든데도 재미있으니깐 계속 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준호 어머니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궁금하네요."
"저는 얼마 전까지 아이들을 키우는 것, 엄마의 삶이 제 인생의 의미였어요. 지금도 제 시간의 대부분을 아이에게 쓰고 있어요. 근데 얼마 전부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 인생은 그냥 '준호 엄마'로 끝인가... 매일 밥 해주고, 애들 학원 보내고, 숙제시키고, 다른 엄마들이랑 맨날 아이들 얘기하고... 저도 결혼하기 전에는 꿈이 있었는데... 그리고 가끔 인스타나 페이스북을 보면 자괴감이 들어요. 제 또래인데도 불구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바디 프로필을 찍는다던가, 여행을 간다던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던가,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요. 한편으로는 '나는 저 시간들을 전부 아이들을 위해 쓰기 때문에 우리 애들은 저 사람들 애들보다는 잘 클 거다.'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냥 자기 위안에 불과한 거 같아요. 솔직히 제가 이렇게 애들한테 목맨다고 해서 애들이 그만큼 더 잘 크는 것 같지도 않아요. 하... 결혼 생활 16년 동안 제가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제 인생이 의미가 있는 걸까요?"
"준호 어머니, 준호 어머니 인생도 '엄마의 인생'으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잘 하고 계세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남들과 비교하면,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집니다. 준호 어머니는 지금 훌륭하고 가치로운 인생을 살고 계세요."
갑자기 준호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눈물이 나왔다. 준호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 또한 0 0 0 이름 석자가 아닌, '00엄마'로 반평생을 살아오셨다. 아들 공부 뒷바라지한다고, 매일 밥 차려주시고, 집안일하시고, 좋은 학원 알아보려고 엄마들 모임도 나가시고, 아들 시험 기간에는 아들과 함께 밤을 새웠던 우리 엄마... 아들 재수할 때, 재수 비용 마련하려고 평생 안 해 본 분식집일까지 하신 우리 엄마... 그 당시 우리 엄마에게 '나와 여동생'은 엄마 인생의 전부였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대학생이 되어도 엄마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에게서 찾고 싶어 하셨다. 밤 10시만 되면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전화를 하셨고 대학교 성적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셨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엄마, 나 이제 성인이에요. 더 이상 저한테 참견하지 마세요.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엄마에게는 그게 충격이었나 보다. 인생의 의미였던 자식들이 엄마의 품을 떠나버린 것이다. 한동안 많이 방황하셨다. 엄마 친구 분이 엄마 요새 힘드시다고 자주 연락해드리라고 전화가 오시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우리 엄마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 매일 동네 아주머니들과 카페나 맛집에 놀러 다니시고 아빠랑 여행도 자주 가신다. 취미도 가지고 계신다. 5년 전부터 바둑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셨는데, 얼마 전에 강사 제의도 받으셨다. 이제는 동생과 내가 섭섭할 정도로 당신 인생에 집중하고 계신다. 예전에 엄마 인생의 90%가 나와 여동생이었다면, 지금은 10% 정도로 이제 우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ㅎㅎ 하지만 나는 지금의 각자 인생을 존중하는 이 상태가 너무 좋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 인생을 살 수 있어서 행복하고, 부모님도 부모님의 인생을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준호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선생님, 선생님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식들 대학에도 다 보내고 새 인생을 찾으신 거잖아요... 자식들 대학 보낼 때까지 그렇게 희생하셨기에 지금 행복하신 게 아닐까요?"
"음... 준호 어머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안타깝지만 중학교 이후부터 엄마가 저에게 신경 써주신 것은 대부분 저에게 도움이 안 됐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었죠..."
"그게 무슨 말이죠???"
"저희 엄마는 제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자식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셨어요. 엄마는 걱정하는 것을 '자식을 위해서 시간을 보낸다.'로 착각하셨어요. 하지만 부모가 걱정을 한다고 해서 자식의 행동이 변화하지는 않아요. 지금 준호 어머니가 준호를 걱정한다고 해서 준호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요. 실제로 중학교 이후부터는 엄마가 저에게 학업이나 진로에서 끼친 영향들은 미미했어요. 이미 저는 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있는데 거기서 엄마의 간섭이 들어와서 방해가 되기도 했어요. 제 생각에는 부모님의 역할은 자식들이 자신의 인생을 즐겁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방향성만 잡아주면 나머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자식들은 부모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도 그들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준호 어머니도 준호 어머니가 아닌 원래 이름 000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
준호 어머니는 생각에 잠기셨다. 긴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그러면 앞으로 제 에너지의 비율이 지금까지는 자식에 90%였다면 한 30% 정도로 줄여도 될까요? 근데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을까요?"
"(웃음) 준호 어머니, 진짜 전혀 문제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대해서 걱정하는 시간을 줄이시고 그 시간들을 실질적인 아이들을 위한 행동으로 옮기신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올바른 생활습관, 공부습관 위주로 체크해주세요."
"사실 제가 제 예전 꿈이 사회복지사였거든요. 애들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었어요. 한 번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와... 좋은 생각이네요! 저는 오히려 부모님이 자식에게 얽매이기보다, 자식에게 꿈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아이들은 부모님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더 많이 배울 수 있어요. 물론 아예 자식에게 신경을 안 쓰면 문제가 되지만, 아까 준호 어머니가 말씀하신 30:70 정도의 비율이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괜찮겠죠? 갑자기 설레네요. 준호 엄마가 아닌, 예전의 저의 인생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깐"
"하하. 저도 설레네요. 앞으로 준호 어머니가 어떤 인생을 펼쳐나갈지 기대가 되네요. 응원합니다!"
무려 3시간이 넘는 상담이 끝나고, 교실문 밖을 나서는 준호 어머니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