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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un 04. 2020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태어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다 해봤을 고민이다. 나의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주변 어른들에게 삶의 목적을 물었다.


'삶의 목적?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해라! 그냥 공부 잘해서 대학 잘 가고, 좋은데 취직해서 돈 많이 버는 게 답이다. 그런 거는 나중에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이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당시 국제구호 활동가인 한비야 씨의 책이 인기였는데, 책 안의 어느 한 구절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열정을 쫓아라.'


그때부터 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무언가 성취를 해서 인정을 받을 때, 내 가슴이 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예체능(운동, 음악)을 열심히 팠다.


나름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 원하던 고등학교에 입학도 하게 되고, 학교에서 제일 노래를 잘한다고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열정은 급하게 불타오른 만큼 금방 식었다. 목표한 것을 성취했을 때만 잠깐 기분이 좋을 뿐, 바로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때의 난 그 이유가 성취한 것들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작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난 미래(더 큰 목표 달성)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는 내 진로와 성적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희생했다. 당시에 내 목표는 서울대 입학이었다. 서울대만 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라 믿었기에 열심히 공부했다. 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밥을 먹는 시간, 친구들과 같이 노는 시간의 대부분을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당장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그렇게 하면 내 미래가 더 나아지고, 모두가 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믿었기에 난 계속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했다.


하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곧바로 난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들이,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던 친구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잘 사는 것을 보면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교육대학에 입학을 해서도 나의 비교는 더욱 심해졌다. 열등감이 하늘을 찔렀다.


대학생 때 그 열등감으로 남보다 나아지기 위해 공부를 해서 학교서 전체 석차 1등을 유지했지만, 나의 욕구는 채워주지 못했다.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면 나아질까 싶어, 여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항상 불안감으로 물들어 있었고 무언가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득했다. 그때까지도 난 깨닫지 못했다. 무엇이 나를 망치고 있는지를...


임용을 합격해서 선생님이 되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또 나에게는 대한민국 최고의 초등교사가 되겠다는 거대한 목표가 앞에 서있었다. 곧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대단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채워졌다. 나는 어디를 가나 나의 꿈을 얘기했고 나 자신을 포장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대단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 패턴의 문제점을 인식한 것은 슬럼프를 겪고나서부터였다. 인간관계, 직장생활, 외모 등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마음속 개념들이 파괴가 되자, 나의 에고 일부분이 허물어졌고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는 지금 나의 의식이 현재가 아닌 미래와 과거에 가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은 근본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외부적인 성공에서 찾는다. 돈을 많이 벌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우거나, 높은 지위를 얻거나,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등등... 하지만 이것들은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부차적인 부분이다. 설사 내가 원하던 외부적 성공을 이뤘다 하더라도, 나의 에고는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먹잇감(외부적 성공)을 찾는다. 우리의 에고(가짜 나)는 외부적인 성공을 통해 완벽해지려고 한다. 현재 이 순간의 나를 과거나 미래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과거와 미래는 허구의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의 과거 또한, 과거의 내가 그 당시 현재를 살며 만들었던 기억들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 또한 현재로 구성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의 대부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의 90% 이상은 불안, 걱정,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과거와 미래 자체가 에고(가짜 나)의 부산물이며 에고는 본질적으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오직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현존)만이 과거와 미래의 부정적 순환고리를 막아줄 수 있다. 현존은 삶에 깊이를 더해준다. 그동안 과거와 미래에 쓸데없이 낭비했던 나의 에너지들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하게 쓸 수 있도록 한다. 당연히 무얼 하던지 성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 현존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세속적 의미의 욜로(물론 욜로의 본 의미와 현존은 어느 정도 통한다고는 생각한다.)와는 다르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은 현재에 나의 에고가 원하는 쾌락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지금 현재만 살게 되면, 내 삶이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말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은 심리적인 부분(불안, 두려움)을 말한다. 당연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언제든지 과거와 미래를 활용할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난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내 외부적 목적 중 하나는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멋진 책을 쓰는 것이다. 미래의 목표에 대해서만 생각을 한다면, 지금 글을 쓰는 행위는 책을 쓰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현존을 하게 된다면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던 현재의 글쓰기 행위가 목적이 되게 되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수단과 목적은 하나가 된다. 그 온전함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욕을 하면 어떨까? 내가 훗날 책을 못쓰는 건 아닐까?'등의 두려움과 걱정은 없다. 과거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난 현재에 집중하며 글을 쓴다. 이 순수한 창조행위 속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 혹시 모른다. 현재에 온전하게 집중하는 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서 훗날 내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쓰는 작가가 되어있을지.



그동안의 나의 작은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외부적인 성공으로는 나 자신 안에 있는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 가장 근본적인 내면의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의 시작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하게 깨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온전하게 깨어있다면 외부적인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사람에게는 외부적인 성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의미를 지금의 나에 맞게 재정의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현재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지금 성공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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