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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un 07. 2020

저는 교사가 되는 것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라고 얘기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을 때,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받을 때, 난 행복감을 느낀다.


최근에는 동학년 선생님들에게 이런 얘기도 들었다. 

선생님은 교사가 천직인 거 같아요.
나는 애들이랑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든데, 선생님은 애들을 좋아하니깐 직업이랑 찰떡궁합이네!
선생님은 정말 애들이랑 있을 때 행복해 보여요.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그것을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운이 좋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일단 직업이 되는 순간, 그동안 즐기던 것들이 일로 느껴질 확률이 높다.


근데 감사하게도 난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좋다. 난 내 직업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렇다. 나는 행운아다.


근데 이런 나도 한 때는 교사가 되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학교 선생님들을 미워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싫었다. 교사는 내 흥미와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사가 된다는 자체가 뭔가 찌질해 보인다라는 생각도 했다. 근데 교사를 극도로 혐오했던 내가 지금 행복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고등학생 때 얘기를 하고자 한다. 난 외고를 나왔다. 신생 특목고라 시에서 많은 지원을 해주었기에, 당시 각 중학교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이 모여 있었다. 난 청춘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친구들과 같이 협력해서 서로 으쌰 으쌰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꿈꾸었으나, 그 기대는 1학기도 안돼서 박살 났다.


우리 학교는 도난사고가 잦았다. 내 옆자리 짝꿍의 교과서, 필기한 노트가 소각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학생들 간의 성적 견제도 심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공부 안 하는 척 가식을 떨면서 친구를 안심시키고는 뒤돌아서면 미친 듯이 공부를 하는 학생이 태반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학교 선생님들은 더 부추겼다.

지금 옆에 있는 친구들은 친구가 아니다. 다 경쟁상대다. 친구는 대학 가서 사귀면 된다.
대학이 전부다. 성적이 전부다.

나에게는 입학할 때부터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끼리도 같은 직장이고 취미도 비슷하여 통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가 지나고 이 친구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었고, 정서적인 부분을 이 친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사실 평소에도 이 친구가 나를 견제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매일 자신은 공부를 하나도 안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던지, 나의 공부량을 체크한다던지... 근데 이번엔 아예 시험 범위를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무조건 1문제 이상을 틀려야 본인의 등급이 오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2 초반에 모의고사를 쳤는데, 상위 전국 0.2%가 나왔다. 평소보다 훨씬 잘 나온 점수였다. 기뻐하던 와중, 우리 학교 모의고사 Top 순위권에 드는 애들이 교실 뒤에 모여서 말하는 내용을 듣고 말았다.

아... 이번 모의고사 너무 쉬워서 쓰레기들이 올라오네... 아 평가원은 왜 이렇게 변별력 없게 시험문제를 내는 거야.

쓰레기...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당장 가서 한 판 싸웠어야 했으나, 난 그러지 못했다. 그 뒤로 난 멘탈이 탈탈 털려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일련의 사건들을 말씀드리고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답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네가 중학교 때 맨날 1등만 하다가, 여기서 1등을 못하니깐 마음이 그런 거야. 괜히 성적이 안 좋으니깐 친구관계에 핑계를 대는 거야. 1등만 하면 괜찮아질 거야.

그날 정말 펑펑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학 가면 안되냐고... 너무 힘들다고... 엄마도 같이 펑펑 우셨다. 왜 다른 애들은 멀쩡하게 적응하는데 너는 왜 적응을 못하냐고... 당신도 너무 힘드시다고 했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탓에 탈모가 생겼고, 원인 모를 귓병이 생겼다.


이 와중에 나에게 빛이 되어준 분이 있었다. 고3 담임 선생님이었다. 교우관계에 대한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셨다. 가족들은 귀 아픈 것이 꾀병이라고 안 믿어주었지만 선생님은 진지하게 들으시고 병원도 몇 번이나 데리고 가주셨다. 고3 담임선생님은 내 정신적 지주였다.


수능을 망쳤다. 억울했다. 나를 쓰레기라고 불렀던 애들한테 진 느낌이 들어 분했다. 1달 동안 잠적했고, 담임 선생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서울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내가 싫어하던 선민의식에 절던 그 무리들과 같이 재수를 하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졸업시키고 나서도 1달에 한 번씩, 재수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서울에 올라오셨다. 담임 선생님이 보고 싶었지만 난 나를 쓰레기라고 부른 그 무리들과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였다. 한 번 가고 그다음은 안 갔다. 아니 못 갔다. 그래도 담임 선생님은 내 사정을 아셨기에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매주 모의고사 문제지들을 챙겨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 카페도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했고 서운한 마음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학생들만 챙겨줄 거야. 왜 내가 똑같이 다 챙겨줘야 하는데? XX(욕설)

5분 정도 폭언을 들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의 나는 선생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때의 나는 상대방의 마음까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귓병은 더 심해졌다. 근데 서울대 대학병원에 가서 MRI, CT를 찍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죽을병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멘탈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재수를 망쳤다.


우리 집은 삼수까지 지원해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든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가야 했다. 부모님이 교대를 권하셨다. 죽어도 싫었다. 남자가 초등교사가 된다는 것이 뭔가 찌질 해 보였다. 나에게 남초등교사의 이미지는 뭔가 꽉 막히고 쪼잔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선생님이란 단어 자체가 싫었다. 그냥 듣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나보고 쓰레기라 불렀던 애들이 '그렇게 자존심 세우더니, 겨우 교대 밖에 못 갔냐?'라고 비웃을 거 같았다.


할아버지까지 집에 찾아오셨다. 손자가 교사가 되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 하셨다. 그렇게 나는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대학교 생활은 잘 적응했다. 초등교육이 흥미에는 맞지 않았지만 적성에는 어느 정도 잘 맞는 듯했다. 여자 친구도 사귀고 학회장도 했다. 근데 그 와중에도 난 자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의 난 열등감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 친구들과 계속 비교를 했고, 현재의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비관했다.


여자 친구, 술, 게임으로 현실을 도피해보고자 했으나, 귓병은 더 심해졌다. 내 멘탈은 박살 났다. 집에서 몇 날 며칠을 누워있다가 문득 든 생각이 '무엇이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가?'였다. 나는 그동안 외고에 들어갔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고, 선생님에게 실망을 했고 등등 일련의 상황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상황은 그냥 상황일 뿐이었다. 상황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해석이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되기 싫은 이유를 찾아보았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생님이라는 개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냥 선생님이란 단어만 들어도 화가 났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나를 위해서, 과거에 상처 받았던 나를 위로했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들의 잘못도 아니라고. 네가 싸워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시스템이고 문화라고.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이 녹아 없어지자, 거기에 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해석들을 불어넣었다.

앞으로 훌륭한 교사가 되어 나 같이 상처 받고 힘든 학생들을 위로해주겠다고. 실력을 키워서 학생들을 힘들게 만드는 교육시스템, 문화를 바꾸겠다고.



그 뒤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방법을 익혔다. 힘들고 상처 받은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마치 과거에 상처 받은 나 자신을 대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진심으로 다가가니 아이들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마치 어떤 느낌이냐면, 매일 아이들이랑 같이 성장하고 공부하는데, 용돈이 매달 17일 따박따박 입금되는 느낌이랄까? 학부모 상담을 밤 10시까지 해도, 아이들 과학대회 지도 때문에 1달 동안 밤 9시까지 근무해도 그냥 좋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힘들지 않았다. 순간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난 원래 교사라는 직업이 싫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교사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했고, 거기에 다시 긍정적인 해석을 부여해, 새로운 나만의 개념을 창조했다. 바로 이것이 내 행복의 비결이다.

어쩌면 상황(직업)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상황(직업)에 대한 내 해석(관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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