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초, 오랜만에 5년 전 제자 진석(가명)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석이는 내가 신규 첫 발령을 받은 시절에 운영했던 농구 동아리의 부원이었다. 내가 직접 담임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소중한 제자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 축구, 수영 등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진석이는 수영을 특기로 삼아, 수영 도대표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수영 전공으로 체고에 입학했다고 나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음... 무슨 일로 연락이 왔을까?'
메신저를 열어보니 이렇게 연락이 와있었다.
문자로는 대화가 힘들 거 같아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진석아, 갑자기 사관학교라니? 너 원래 수영선수가 꿈 아니었어?"
"수영은 그동안 부모님이 시켜서 한 거예요. 공부가 안 되니깐, 운동이라도 하라고 하셔서... 예전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수영을 했는데, 지금은 꿈이 생겼어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장교가 되는 거요. 근데 문제가 체고에 계속 있으면 기숙사 생활이고 대부분 운동 위주로 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할 거 같아요. 내신 따기는 인문계보다는 쉬울 거 같기는 한데...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음... 체고에서 사관학교에 입학한 사례가 있어?"
"아마 없을 걸요...?(나중에 전화로 확인해보니 없었음) 제 생각에는 확실히 사관학교 쪽으로 갈 거면, 더 늦기 전에 인문계 학교로 전학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흠... 선생님 생각에도 만약 네 꿈이 정말 장교가 되는 거라면 공부 환경 측면에서 체고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일반고로 전학 가는 게 좀 더 나을 거 같네. 근데 혹시 지금 선생님한테 한 얘기 부모님한테는 해봤어?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사실 그거 때문에 연락드린 것도 있어요. 부모님이 엄청 반대하세요. 공부도 안 되는 놈이 갑자기 무슨 해군사관학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세요. 제가 꿈을 못 이룰 거라고 단정 짓고, 아예 제 얘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세요. 일단 전학은 절대로 안 된대요."
"음... 선생님은 네 마음도 이해가 가고, 부모님 마음도 이해가 가는데... 일단 팩트체크부터 해보자. 혹시 진석이 너 중학교 때 내신성적이 어느 정도 되지?"
"반 27명 중에 24등 정도요..."
"국, 영, 수 주요과목 성적은?"
"국어는 평균 정도 하고, 영어는 중하, 수학은 거의 최하점이요..."
"수영은 최근에 성적이 어느 정도지?"
"도 1,2등은 하는데, 전국대회 나가면 진짜 상대도 안 돼요..."
"네가 만약에 부모님이라면, 수영을 잘하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공부를 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
"(한동안 침묵) 선생님, 그래도 저는 할 수 있어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잖아요."
"그래, 물론 선생님은 너를 믿지. 근데 일단 선생님이 지금 제일 우려되는 거는 네가 혹시나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현실도피용으로 사관학교라는 꿈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야. 예전에 네가 선생님한테 운동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잖아. 코치님이고 감독님이고 빡세게 운동시키고, 경쟁도 치열하고..."
"선생님, 그런 건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제 나름대로 진짜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그래? 흠... 그렇다면 지금부터 객관적으로 네 상태를 살펴보자. 쌤이 '오, 우리 진석이 할 수 있을 거야. 화이팅!'하면서 가짜긍정을 불어넣어줄 수는 있지만, 사실 이건 너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쌤이 지금부터 좀 팩폭 날려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ㅎㅎ"
"전교에서 최하위권 성적에다가, 주요과목인 영어, 수학도 잘 안 되고... 보통 사관학교 들어가려면 전교 순위권에는 들어야 되지 않나? 거긴 시험도 주요과목 시험도 치잖아. 특히 수학이 중요한데, 넌 지금 초등수학도 제대로 안 되는 상태고... 초등까지 합쳐서 9년 동안 공부를 했는데도 이모양인데, 무슨 수로 3년 만에 전교권 수준으로 성적을 만든다는 거지?"
"(...) 선생님 말씀 맞아요. 근데 저 진짜 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요."
"네가 지금은 마음이 벅차오르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지? 한 몇 달만 지나 봐라. 평생 안 하던 공부를 갑자기 잘할 수 있을까? 네가 지금 네 친구들 따라잡으려면 그 친구들보다 몇 배는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하는데? 너는 그동안 공부를 안 한 상태잖아. 정말 3년 동안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자신 있어?"
"선생님, 저 진짜 마음먹으면 하는 남자예요. 할 수 있어요. 지금 도전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요.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
"음... 진석아. 그럼 이렇게 해보자. 지금 네가 말하는 바로 일반고로 전학 가는 거는 너무 리스크가 커. 분명 부모님도 용납 못 하실 테고... 만약 운동을 포기하고 전학을 갔는데, 공부가 네 길이 아니라면? 그러면 망하는 거잖아."
"그렇죠."
"사람 일이란 모르잖아? 항상 최악의 경우의 수를 대비해야지. 그럼 이건 어때? 지금 1학기 때, 네가 다니는 체고에서 내신 1등에 도전해보는 건? 내신 1등을 달성하고 부모님한테 네 꿈에 대한 진심을 전하고 전학을 가는 거지. 그 정도 실천력을 보이면 아마 부모님도 네 편이 되어 주실 거야. 그리고 혹여나 도전에 실패해도 리스크가 전혀 없잖아. 딱 1학기만 네 의지를 테스트한다고 생각하고 도전해봐.
"오... 괜찮은 거 같은데요? 도전에 성공하면 부모님의 지원과 일반고 전학, 실패하면 깔끔하게 꿈을 접는 걸로, 이렇게 하면 될까요?"
"어, 선생님 생각에는 그게 베스트인 거 같은데... 일단 조금만 더 고민해봐. 공부 관련해서 도움 필요하면 선생님한테 언제든지 연락하고!"
"네! 쌤~ 오늘 고민상담 감사합니다!"
(8개월 뒤)
진석이와의 연락은 6개월 전, 공부방법 관련해서 연락을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눈앞에 일들이 너무 많아서 진석이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문득 퇴근길에 보낸 카톡,
체고에서 1학기 내신성적을 잘 받으면, 일반고로 전학을 보내주는 걸로 부모님과 약속을 했고, 내신성적을 잘 받아서 8월에 전학을 온 상태라고 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시던 부모님도 꾸준히 노력해서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 현재는 든든하게 지원을 해주신다고 했다.
"쌤, 근데 여기 오니깐 애들이 장난 아니에요.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이네요... ㅎㅎ"
"네가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하게 노력만 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네, 빨리 상위권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ㅎㅎ"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또 연락하고~ 항상 응원한다!"
"넵! 선생님~ 저도 항상 선생님 응원할게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이 꿈인 진석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1학기 동안 스스로의 의지력을 테스트하고 그 테스트를 통과한 진석이. 꿈을 위해 과감하게 힘들게 입학한 체고를 포기하고 일반고로 전학 온 진석이. 이제 꿈을 향한 서막이 시작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