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마다 다 그런 시기가 있지 않은가.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무얼 해도 재미가 없는 그런 시기 말이다.
갓 부임했을 적에 열정적인 선생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영혼 없이 기계처럼 수업만 하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만 남았다.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보여도, 교실이 엉망이 되어도 그냥 놔두었다. 엉망이 된 교실은 마치 난장판이 된 내 마음 같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직장 동료들도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마음도 점점 나를 떠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에는 학급 운영에 대한 불만을 가지신 학부모님의 민원전화를 받았다.
그냥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더 이상 망가진 내 상태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싫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못난 담임이라서.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내가 이대로 교사를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고민 끝에, 일단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서 내 상황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다음 날, 교장선생님과 약속을 잡았다. 목요일 오후 3시에 오라고 하신다.
하지만, 난 목요일 오후 3시에 교장실에 가지 않았다.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교장선생님에게 나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날 나는 그렇게 현실을 회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정말 미친놈이었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과의 약속 펑크라니...)
이튿날 아침, 학교 본관 앞에서 교장 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나: '하... 망했다...'
교장선생님: 00아, 어제 약속 때문에 교장 연수도 다 취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안 온 거니?
당연히 화를 내실 줄 알았던 교장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지 않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교장선생님: 오늘 3시에는 꼭 교장실로 와라.
이번엔 도망가지 않고 교장실로 갔다. 더 이상 피하기만 하기에는 교장선생님께 너무 죄송스러웠다. 교장실에 가니,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차를 타 주셨다. 제가 하겠다고 해도 기어코 본인이 하시겠다고 한다.
그동안에 있었던 일, 나의 심리 상태, 현재 반의 상황, 교직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말씀드렸다. 더 이상 선생님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씀드렸다. 그 오랜 시간을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선생님은 한마디도 하시지 않으시고 경청하셨다. 나의 얘기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은 잠시 고민을 하신 뒤 말씀하셨다. 그때 처음 하신 말씀은 너무나 의외이고 충격이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교장 선생님: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너의 상황을 직접 겪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너무 놀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상태를 예단하고 곧바로 별 도움도 안 되는 해결책을 내주실 줄 알았는데, 교장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교장선생님: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얘기 한 번 들어보겠니?
아주 겸손하고 담담한 어조로 본인의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파란만장했던 신규 시절, 힘들었던 중년교사 시절, 최근 몇 년 사이 생긴 암. 교장 선생님의 인생도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각자 인생에 저마다의 굴곡이 있었다.
교장선생님: 00아. 사실 나는 어떤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살지는 않았어. 그냥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렇게 하나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그 와중에 행복감도 느끼고.
나: 교장선생님. 실례지만, 교장선생님이 최근에 몸이 안 좋으시잖아요. 가끔 몸이 아플 때, 불행하다고 느끼시지 않으세요?
교장선생님: 내가 나이가 들어서, 젊었을 때 몸을 혹사시켜서 이렇게 몸이 아픈 건데 어쩔 수 있나. (웃음) 나는 이렇게 학교에 나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랑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뭔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교장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
교장선생님: 00아. 괜찮다. (...) 괜찮다. (...) 괜찮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나는 교장실에서 펑펑 울었다.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 후, 몇 달이 지났다. 사실 유명 영화처럼 한 순간에 내가 바뀌지는 않았다. 대신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욕심내지 않고, 내 눈 앞에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해나갔다.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내 주변 상황들이 점점 나아졌고, 삶의 의욕과 교육에 대한 열정도 다시 되찾게 되었다.
엉망진창이었던 우리 반도 다시 체계와 질서를 갖추게 되었고, 떠나갔던 아이들의 마음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부모님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주변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내 든든한 후원자셨다. 다시 열정을 되찾은 내가, 하모니카 동아리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학생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도, 교사 기타동아리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항상 응원한다!'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났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그날은 교장선생님의 퇴임식이었다. 나는 선생님들 대표로 교장 선생님 앞에서 015B의 '이젠 안녕'을 불렀다. 교장선생님이 힘든 나를 도와주시고 챙겨주시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노래 가사를 중간쯤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