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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Aug 25. 2023

우리 반에 왕따가 없는 이유

* 본 콘텐츠에 등장하는 인명은 가명입니다.      

    

6학년 1학기, 서로 어색했던 지난 3월이 지나가고, 4‧5월 아이들이 점점 친해지면서 반 분위기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성대의 시절은 잠시. 5월 말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친구들이 저를 은따(=은근히 왕따) 시키는 거 같아요. 주말에 같이 놀기로 했는데, 저만 빼놓고 놀기도 하고 제 전화를 안 받기도 하고... (눈물)”

     

“선생님, 저는 아토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긁는 건데 애들이 저보고 더럽데요. 사실 참으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어요. 친구들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게 힘들어요.”

     

“애들이 저를 뒷담화하는 걸 들었어요. 뚱뚱하고 못 생겨서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다고... (눈물)”

     

더 이상 아이들이 반목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서로 친밀감을 회복하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친밀감을 형성하려면, 그 누구도 듣거나 본 적 없는 자신만의 생각, 자신이 처한 환경과 경험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거나 들려준 적 없는 생각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상대방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p297

친밀감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소위 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장애물을 제거한다. p.300

피파 그레인지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심리학> 中

실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프리미어리그, 미국 미식축구리그의 프로팀들은 팀의 결속력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동료들과 공유하는 ‘유대감 강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도 ‘유대감 강화 프로그램’과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1급 정교사 연수 때 배운 서클 활동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들끼리 둥그렇게 둘러앉아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차례대로 얘기하고 경청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잘만 활용하면 프로 선수들의 ‘유대감 강화 프로그램’만큼이나 아이들에게 좋은 활동이 될 거 같았습니다. 다음 날 바로 교실에 적용해보았습니다.

서클 활동을 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수업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신나 했습니다. 잔뜩 들떠있으면서도 처음이라 그런지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어색해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서클의 활동 방법과 규칙을 설명했습니다.            

1. 선생님이 주제를 제시하면, 주제에 해당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말합니다.
2. 토킹피스(=말하기 도구)를 가진 사람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4. 서클에서 나온 이야기는 비밀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반에 토킹피스 교구가 따로 없었기에, 지은이의 가방에 달려있는 인형을 토킹피스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토킹피스

우선 가벼운 주제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 반이라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이 있어서 좋아요.”

“친구들이 있어서 좋아요.”

“체육 수업을 많이 해서 좋아요.”

     

그 밖에도 나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 친구에게 서운한 점 얘기하기 순으로 서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생각보다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머뭇거리던 아이들도 어느 시점부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말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다들 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친구에게 서운한 점을 얘기할 때에 아이들이 반응이 가장 좋았는데요. 서로 쌓여있던 오해와 감정을 풀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서클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서클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서클 전에 비해 아이들의 친밀도도 많이 높아졌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정도면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얘기할 거예요. 그리고 서클에서 나온 얘기는 비밀 지켜야 하는 거 다들 알고 있죠?”

     

아이들에게 5분간 고민할 시간을 줬습니다. 주제가 무거워서 그런지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먼저 선생님인 저부터 시작했습니다. 군대 전역 후 2년 차 교사일 때, 미숙함으로 학급이 붕괴될 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땐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정말 두려웠다는 얘기도 함께요. 아이들은 조용히 제 얘기를 경청했습니다.

     

제 차례가 끝나고 한 사람씩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헌이는 몇 년 전 자신의 장난으로 동생의 손가락을 다치게 해서 아직까지 죄책감으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동생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얘기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지효는 3, 4학년 때 반 친구들에게 은따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현석이 또한 5학년 때 더러운 짓을 한다고 왕따를 당해서 힘들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현석이의 얘기를 듣고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듯(=넌 왕따를 당할만하다.) 표정을 짓는 몇몇 아이들을 보다 못해, 제가 중간에 나섰습니다.

“너희들, 왜 현석이가 계속 몸을 긁는지는 알고 있어? 현석이는 매우 심한 아토피가 있어. 지금 10년 째 약을 먹고 고치려고 해도 잘 안 낫는데. 현석이가 너희들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야. 자기도 바뀌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선생님한테 와서 몇 번이나 상담도 하고 긁는 것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선생님 눈에도 보이는데, 너희는 그게 안 보이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정말 고치기 힘든 아토피 병을 너희가 지니고 있다고.”

     

갑자기 현석이가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현석이에게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습니다.

“미안. 나는 그 정도까지인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이번에는 승원이의 차례였습니다.

“3년 전에 우리 엄마가 엄청 아프셔서 수술을 하셨거든... 근데 그때 잘못하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해서, 혹시나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진짜 매일매일이.... 두렵고... 무서웠어... (눈물)”

     

평소 엉뚱하고 장난기 많은 승원이가 갑자기 서럽게 눈물을 흘리자, 반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듯 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승원이를 따라 울기 시작하더니, 저를 포함 반 대부분의 구성원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번에는 지원이의 차례였습니다.

“사실... (눈물) 사실... 내가 몇 년 전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 그게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 안 하다가 제일 친한 친구한테 얘기했는데... 걔가 뒤에서 애미 없는 자식이라고 나 욕하고... (눈물) 그때만 생각하면 친구를 믿은 내 자신에게 화가 나...”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친구의 배신에 대한 지원이 속상함이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반 친구들에게 얘기를 함으로써 다시 한번 친구를 믿어보고자 하는 지원이의 마음도 느껴졌습니다. 그 맘을 아는지 지원이 주변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울고 있는 지원이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출처: 언스플래시

그날 절반 정도의 아이들이 자신의 힘들었던 기억을 얘기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친구들의 얘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경청해주었습니다. 신기한 건 서클 활동이 끝난 후, 오히려 자신의 아픈 기억을 얘기한 친구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서클 활동하고 나서 뭔가 속이 시원해요. 뻥 뚫린 느낌이랄까.”

“선생님, 이 주제로 또 하면 안 돼요? 또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도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지원이가 그동안 까칠하게 행동했는지 알 거 같아요. 제가 위로해주고 싶어요.”

     

그날 서클 이후, 저희 반의 유대감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서클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친구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요즘 자녀와 많이 소원해졌다고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자녀가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이나요? 그렇다면 함께 진심 어린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떤가요? 아픔을 치유하려면 아픔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의 아팠던 기억을 얘기하면서, 좀 더 돈독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위 글은 2022년 11월 스쿨잼에 업로드된 글입니다.

https://blog.naver.com/naverschool/222930903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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