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남 Oct 09. 2023

내가 재외한국학교에 지원한 이유

"선생님은 이곳에 지원한 이유가 뭔가요?"


지난 2월 재외한국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음... 그냥 삘(feel)이 왔습니다. 여기 학교를 보자마자 여기서 생활하는 그림이 순간적으로 확 그려지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곧바로 이곳에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다소 축약되고 장난 같은 나의 대답에 교장 선생님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다.


삘이 왔다는 건 사실이었다. 다른 재외한국학교에는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다가, 여길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 간 다양한 경험들을 하며 즐겁게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그림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직감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편이다.

"그냥 끌려."

군생활 조교에 지원할 때에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결심을 한 것도 모두 이 삘(feel)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삘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건 아니다. 바쁜 조교 생활 덕분에 전여자친구와 헤어지기도 했고, 교육에 대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군생활 이후 1년 간 매일 자살충동이 들 정도로 슬럼프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성장통 없는 성장은 없는 법. 아픔이 지나가고 나면 한층 더 부쩍 성장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별의 아픔을 딛고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과도한 신념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걸 알게 된 뒤에는 교육에 대한 철학도 한층 더 선명해졌다. 2년 간의 무기력한 삶을 산 뒤에는 삶의 이유 또한 찾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학교에서 느껴지는 삘도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주지 않을까?'


분명 힘들 게 뻔했다. 한국 소재 학교에 비해 업무량도 많고, 중국 현지와 새로운 학교 시스템에 적응도 해야 하는 등 고생길이 훤했다. 부모님은 요새 중국 상황 안 좋은데 뭐 하러 사서 고생하냐고, 아들이 한 번 더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 심하게 반대하셨고,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굳이?'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 또한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을 알기에 과감하게 재외한국학교에 지원을 했다.


(지원 후 7개월 뒤)


하지만....

"하... 진짜 내가 왜 그랬을까?"


2023년 5월, 난 7개월 전에 내린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 거지 같은 삘 때문에 또 이렇게 고생하네. 하... 한국 가고 싶다."


한국의 5~6배 정도 되는 업무량에 치여 나는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는 하루살이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목표도 비전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집단무의식에 휩쓸려 좀비처럼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라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나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일을 멈추고, 삘만이 아닌 내가 이곳 재외한국학교에 지원한 구체적인 이유를 천천히 고민해 보았다.


첫째, 아이들과 자유로운 교육활동을 하고 싶었다. 예비 선생님 시절 이런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주말에 반 아이들과 함께 산, 바다에 놀러 가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서로의 꿈을 얘기하는, 동료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고민하고 함께 응원하고 성장하는 마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 맞다.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옆 반과의 형평성에 어긋나서 안 돼요."

"혹시나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깐 안 돼요."

"학부모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 안 돼요."


그놈의 '안 돼요.'는 왜 이렇게 많은지. 마치 축구 경기를 하는데 선수는 없고 심판만 잔뜩 있는 느낌이랄까? 심지어는 학업 수준이 달리나 학습 의욕이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에 교육 활동을 하거나 자율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관리자 분들은 안 된다고 하셨다. 혹시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늦게 마치고 하교하다 학교폭력사건에 휘말리거나 교통사고가 생길 수도 있어서라나...


하도 안 된다고만 하니,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규칙을 어기는 수밖에. 몰래 아이들과 주말에 모였고, 몰래 몇몇 아이들을 남겨서 공부를 시켰다. 반 아이들의 공부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학교 몰래 온라인스터디를 만들어서 매일 저녁에 줌에서 모이기도 했다.


근데 이 학교는 뭔가 달라 보였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교육활동들을 오히려 장려하는 느낌이랄까? 선생님들과 관리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학부모 민원도 거의 없다고 했다. 마치 15~20년 전 학교 분위기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초중고가 합쳐져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보였다.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그 아이들이 중학교에서 잘 생활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초중고 학생들이 연합해서 뮤지컬 공연을 하는 등 여러 활동들을 같이 하는 그림도 그려졌다.


둘째,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에서 교사 교실남으로서의 삶은 너무 뻔해 보였다. 매일 똑같은 쳇바퀴 같은 삶. 적어도 이 쳇바퀴를 부수려는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타국에서의 생활, 다문화가정 아이들과의 만남, 외국인과의 친교활동, 여행 등은 매너리즘에 빠진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셋째, 내 안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서 언젠가 내 꿈을 실현할 바탕을 만들고 싶었다. 다음은 1년 전 내가 브런치에 썼던 내용이다.

소외받는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만들고, 타인의 성장을 돕는 책을 쓰고 싶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험가가 되고 싶다.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잠재력을 끌어올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내 안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재외한국학교는 교육자로서의 내 잠재력을 끌어내는데 최적의 환경처럼 보였다.



이 세 가지들 중 나는 몇 개나 충족했을까? 혹은 몇 퍼센트 정도나 목표를 충족했을까? 지금 난 원래 내가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의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고민의 밤은 깊어만 가고 그렇게 6월이 다가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