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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Nov 05. 2023

나는 학교의 평등주의 교육이 싫다.

지난 5월 운동회가 끝나고 한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이번에 운동회 업무한다고 고생 많으셨어요. 근데 아쉬운 게 딱 하나 있는데 얘기해도 될까요? 계주 있잖아. 소수의 달리기 잘하는 아이들만 뛰는 게 좀 그렇더라고. 내년에는 전교생이 전부 뛰는 걸로 바꿨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음... 전교생이 다 뛰면 계주가 재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계주는 운동회의 꽃인데... 뛰는 걸 좋아하는 아이도 있지만, 구경을 하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도 있더라고요. 이번에 아이들이 계주 빼고 나머지 게임에 다 참여했는데, 굳이 계주까지 모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재미가 없더라도 다 같이 평등하게 모두 다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죠. 반 대표로 못 뛴다고 상처받는 애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 아들도 그때 계주 못 뛰었다고 속상해하더라고요. 뭐, 강요는 아니고 내년에 업무 추진하실 때 참고 부탁드려요."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운동회라... 얼핏 들으면 타당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경험했던 운동회와는 많이 다르다. 과거의 청군과 백군이 나뉘어, 치열하게 점수 경쟁을 하는 형태의 운동회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경쟁을 하고 등수를 매기면 아이들이 상처받는다는 이유로 웬만한 경쟁 요소가 있는 부분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별 대항전, 개인 달리기 같이 등수가 나눠지거나 경쟁 요소가 있는 것들은 체험형 프로그램(림보, 자유투 던지기, 투호 등)으로 바뀌고 있다.


설사 기록에 의해 등수가 나눠진다 해도, 잘한 아이들이나 못한 아이들은 전부 동일한 보상을 받는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평등한 운동회여야 하기 때문이다. 상 이름도 가관이다. 마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죄악인 양, '우리가 최고다상', '멋지다. 우리상', '모두가 최고야상' 등 상이름만 봤을 때 어느 반이 제일 잘했는지 알 수 없게끔 상을 준다. 웃긴 건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어느 반이 제일 잘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이번 학예회 행사를 추진하면서도 여러 선생님들에게 비슷한 의견을 들었다. 이번 학예회는 학부모님을 초대해서 보여주기식 단체 공연을 했던 작년과 다르게 학부모님을 초대하지 않는 '학생 중심 학예회'라는 콘셉트로 진행을 한다. 반 별 단체 공연이 아닌, 아이들이 각자 원하는 공연(개인, 그룹)을 12교시에 각 반에서 진행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은 학생들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34교시에 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여 슈퍼스타Y라는 경연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다.


슈퍼스타Y는 학생회 아이들이 낸 아이디어로 한때 인기 경연 프로그램이었던 슈퍼스타K를 본떠 만든 프로그램이다. 전담 선생님 세 분이 심사위원으로 나와 '제 점수는요?' 하면서 평가를 하고, 점수가 가장 높은 TOP3 팀에게는 보상을 주기로 했다. 학예회 때, 슈퍼스타Y 행사가 열린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평소에 춤이나 노래, 연기 등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미친 듯이 맹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선생님들끼리 모여 학예회 회의를 시작했다.

"선생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왜 굳이 아이들의 순위를 매겨 1~3등 상을 주는 거죠? 그냥 나와서 공연하는 걸로 하죠. 순위 안에 못 든 아이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리고 만약 상을 준다면 전체 똑같이 상을 주는 걸로 하죠."


"음... 열심히 노력했는데 노력하지 않은 사람과 보상이 똑같다면 아이들이 열심히 할까요? 만약에 슈퍼스타K에서 실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보상을 줬다면 그 프로그램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참여했을까요?"


"그건 어른들의 세계잖아요. 어차피 중학교 가면 경쟁 많이 해요. 굳이 초등학교에서까지 경쟁하면서 애들한테 상처 줄 필요 없죠."


"아니, 왜 경쟁을 나쁘게만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애들은 상처받으면 안 되나요? 경쟁에 참여해서 실패하는 경험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요? 떨어진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의 격려를 받아 내년에 더 열심히 해서 순위권 안에 들어야지 의지를 다지는 아이들도 있을 거고요. 노력해서 다음 해나 그다음 해에 좋은 성적을 거둔 아이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얼마나 값질까요?"


나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에는 3등까지 등수를 매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모든 이들에게 참가상을 주고, 잘했다상, 내가 최고다상, 멋지다상 등 1, 2, 3등을 구분할 수 없게끔 상이름을 짓자는 것이 선생님들의 조건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학생회 아이들과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얘들아, 등수 구분 없이 보상이 모두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 그러면 진짜 의욕이 떨어질 거 같아요. 열심히 하나 안 하나 보상이 똑같으면 저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준비할 이유가 없죠. 그건 진짜 아닌 거 같아요."


아이들도 아는 걸 왜 선생님들은 모르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운동회나 학예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수행평가 등급을 '잘함', '아주 잘함', '아주 아주 잘함' 이렇게 3등급으로 나누었다. 성적으로 인해 아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잘함'이 진짜 잘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실력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잘함'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기에 학기말 통지표를 받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좋아했다. 근데 과연 이런 등급 구분 방식이 아이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걸까?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는 체육시간에서도 적용이 된다. 피구 할 때 가장 많이 싸우는 경우가 '모두 다 똑같은 횟수로 던져야지. 왜 나보다 네가 공을 더 많이 던지냐?'이다. 아이들끼리 공놀이 연습 하는데 기회를 평등하게 받는 것이 그럴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맞다. 동의한다. 연습을 할 때에는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받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협동해서 승리를 해야 하는 반 별 대항전에서조차 이러한 태도가 유지가 된다면? 반에서 제일 피구를 못하는 아이가 자신은 패스를 받거나 공을 던지지 못했다고 징징 거리며 반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이때 대부분 선생님의 대응은 어떨까? 내가 봐왔던 대부분 선생님들의 대처는 10에 9는 공을 들고 있는 운동 잘하는 친구를 나무라며 징징 거리는 친구에게 공을 던질 기회를 준다. 이 선택으로 인해 팀사기를 저해하고 반 대항전에서 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과연 이러한 교육이 옳은 걸까? 징징거려서 공을 던질 기회를 제공받았던 이 아이는 이번의 학습효과로 본인의 실력을 늘릴 생각은 안 하고 나중에도 남 탓을 하며 징징 거리지 않을까?


무슨 아이들이 프로 선수도 아니고, 그냥 좀 기회 주면 되지 쪼잔하게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너는 얼마나 잘하길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평등의 교육을 비판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 불리는 곳으로 훗날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사회의 규칙을 100% 적용을 할 수는 없더라도, 강도를 조금 약하게 해서라도 70~80%는 적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쟁 없는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한 그런 사회는 없다. 학교의 역할은 능력주의,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미리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문제상황을 경험시켜 주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육철학에 입각해 체육 전담교사일 때의 나의 교육방식은 이랬다. 아까 위 사례처럼 본인 실력은 생각 안 하고 기회를 안 준다고 반 대항전에서 징징 거리는 학생이 있으면 난 따로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00아, 너한테 지금 아이들이 패스를 안 해주는 건 왜 그럴까? 애들이 네가 싫어서? 너를 왕따 시키려고? 아니야. 네가 피구를 잘 못하기 때문이야. 그럼 앞으로 패스를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피구 실력을 늘리면 되겠지? 지금 패스를 많이 받는 아이들을 봐. 다들 잘하는 아이들이잖아. 이 친구들이 태어날 때부터 피구를 잘했을까? 아니, 물론 타고난 아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야. 애초에 연습한 양이 다르고 실력이 다른데, 반 별 대항전에서 너랑 똑같은 횟수로 공을 던지는 게 그게 공정한 걸까?"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음..."


"하지만 선생님은 너도 앞으로 피구를 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왜냐하면 선생님도 예전에 너처럼 피구를 잘 못 했거든. 근데 선생님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음... 연습을 해서?"


"맞아. 진짜 미친 듯이 운동을 했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연습을 했어. 그러니깐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고 주변에 친구들도 인정해 주더라고. 00이 너는 선생님보다 운동 신경이 훨씬 더 좋으니깐 더 빨리 실력이 늘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깐, 이따가 쉬는 시간에 남아서 연습하고 가는 건 어때?"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네!"


그 후 00이는 어떻게 변할까? 내 경험상 대부분 00이들은 더 이상 징징 거리지 않았다. 게임이 잘 안 풀리면 남 탓이 아닌 자신의 실력을 탓했고, 쉬는 시간에 연습도 하고 나에게 와서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묻기도 했다. 체육 시간의 수준이 더 높아지고 재미있어진 것은 물론이다. 경쟁에서 뒤처진 혹은 학습된 무기력에 갇힌 아이들이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응원과 격려.' 난 이것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용어를 구분하려고 한다.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지금껏 내가 비판한 것은 결과의 평등이다. 당연히 기회는 모두가 똑같이 제공받는 것이 옳다. (계주의 경우, 원하는 아이들을 모집해서 정정당당하게 달리기 시합을 해서 대표를 뽑았기에 기회의 평등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학교 교육에서 잘하건, 못하건, 노력을 하던 노력을 안 하든 간에 모두가 똑같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관념이 아이들에게 심어지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경험상 이러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남 탓은 오지게 잘한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실질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성장은 없고 듣기 좋은 말만 늘여 놓는 그런 교육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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