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동안 환경캠페인과 환경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랬더니 거짓말 처럼 주어졌다.
시가 임대한 문화재 공간. 지역문화거점으로 운영 해 나갈 PM 직을 시가 제안했을 때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물론 그림을 나 혼자 그리는 것은 아니다. 문화, 경제, 지역연구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과 1달의 1번의 회의를 통해 운영 방향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예산이 삭감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상반기가 지나갔다. 공간 운영의 기회를 처음 잡은 PM은 모든 것이 아까웠다. 얼렁뚱땅 지나가 버린 시간들, 이렇게 멋진 공간이 거의 대부분 비워져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과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성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재 예산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대관을 통한 공간 활용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대관 메뉴얼이 완성 되었고 외부 홍보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임대 기간의 절반이 벌써 지났다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이 공간이 생기발랄 한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간 운영 현황을 자문단에게 설명하는 와중에 공간 임대 기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게 되었다.
"네? 이 공간이 1년 임대였나요? " 자문단 가운데 40대의 지역연구 박사 한분이 놀란 듯이 물었다.
'네. 시에서는 가능한 한 임대 기간을 늘리거나 매입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어요. 그러나... 확실한 건 없습니다.'
"아니 1년 임대였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내 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열심히 이곳을 시민들이 활용하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내년이 안될 수도 있으니까요' PM은 힘을 실어 자문단의 동의를 구했다. 아니 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있던 박사는 얼굴이 빨개지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보통 이렇게 누군가에게 심하게 이야기 하는 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박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뱉어 냈다.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그가 그렇게 분노하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운영이 정말 잘되서 마을 사람들이 더 큰 기대를 갖는다면, 만약 내년에 이 공간의 운영이 정지 되었을 때 마을 주민들의 상실감은 누가 책임지죠? 나 몰라라 빠지면 끝입니까 그 상실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너무 무책임합니다!"
정말 뜻밖의 이야기 였다. 그건 마치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남자의 어떤 행동에 상처를 받아 그에게 부드럽게 '당신이 지금 나를 아프게 해요' 라고 힌트를 주는데 '그건 저 알바 아니에요' 라는 차가운 답을 들었을 때의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그런 기분. 정말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 같은 것을 이렇게 완벽하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구나.
박사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우리 공간은 외부 활동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갖게 해서도 외부에 홍보를 해서 공간이 마치 계속 운영될것처럼 인식을 주는 것도 삼가해야 한다고.
나는 그의 눈을 다시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가 말하는 상실감에 대한 책임이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까지 타인의 상실감에 공감 할 수 있는 박사가 달리 보였다. 그는 사람을 보고 있구나,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일을 하는구나...
'최근에 '2050 거주불능 지구'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아니, 다른 많은 기후변화를 우려하는 자료에 따르면 우리에겐 확실히 보장된 안전한 미래는 없습니다. 암울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에 저는 오늘 하루를 더 진지하고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예를 든 것이 조금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내년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상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올해는 조용히 지내야 한다는 것에 동의 할 수 없어요.'
박사의 얼굴은 여전히 빨갰지만 표정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에는 희미하게 미소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의 생각이 내 의견에 의해 달라진건 아니였다.
자문의 결론은 많이 그렇듯 결국 자문은 자문일 뿐 실행자들이 잘 숙지해서 실행해 나가자라는 방향으로 자리를잡았다. 나는 어떻게 정리하고 실행해 나갈 것인가?
나의 답변처럼 나는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채워갈 수 있을까? 7월 자문단 회의 이후 자주 그 박사님의 이야기가 뛰쳐나온다. 경험은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박사님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다음 주 수요일, 8월 자문단회의가 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회의 서류에는 8월 이후 저비용으로도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제안이 들어있다. 박사님의 염려는 나의 사고를 넓히는 간접 경험이 되었다. 오늘을 사는 나의 삶의 방식에 분명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오늘 하루를 멋지게 채워갈 무언가를 꿈꾼다.
짧지만은 않은 나의 인생경험에서 나는 많은 순간 일희일비했다. 그런 나를 탓하지는 않는다. 슬픔과 기쁨이, 희망과 절망이 너무나 교묘히 어우러져 있는 인생이기에 나는 그것들에 견디는 힘을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듯 사람들 역시 자신의 몫에 해당하는 그런 것들을 견뎌낼 힘을 키워야 하고 또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 위기로, 혹은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로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 안전한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하루를 포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