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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갓 Mar 13. 2020

동식이

 오늘도 회사에서 열심히 월급 루팡을 하다가 갑자기 고등학교 때가 떠올랐다. 정말 갑자기 떠올랐다. 얼마나 ‘갑자기’였는지 한참을 생각해봐도 딱히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지 적확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다가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에 잠을 깰 만큼 무더운 한여름 날,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온 세상이 까매지고 폭우가 쏟아질 만큼(실제로 작년 이맘때쯤 그런 날이 있었다) 갑자기였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동식이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약간은 어눌해 보이는 친구였다. 겉모습은 약간 꾀죄죄해 보였고, 만화와 소설, 게임을 좋아하는 약간은 오타쿠 같은 느낌도 났다.

 나는 그런 동식이를 그저 우리와 관심분야가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동식이의 표현방식은 순수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동식이가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했고,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은 동식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 동식이의 반응에 재미있어 했다. 나는 의협심에 넘쳐서 동식이를 맹목적으로 지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동식이가 좋았을 뿐이다.

 내가 가끔 동식이가 읽고 있는 소설이나 만화에 대해서 물어보면 동식이는 차분한 어조로 답해주었다. 그때마다 동식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약간 어눌했지만 순수함이 느껴졌고,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주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동식이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척하거나, 공감하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동식이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었을 뿐이다.

 가끔 친구들의 장난이 지나칠 때면 동식이는 화를 내거나, 혼자 화난 표정으로 말없이 그것을 삭히기도 하고, 이런저런 돌발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몇 번이나 단체 기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수학여행에 가서 일이 터졌다. 몇몇 아이들이 수학여행의 분위기에 취해 텐션이 올라갔는지 동식이에게 계속해서 장난을 쳤다. 결국, 동식이의 인내심이 폭발해버렸고, 화를 내고는 숙소 복도 끝에 있던 발코니로 가서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벽 쪽을 바라보고 풀썩 앉아버렸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했고, 우리 반 반장까지 나섰지만 동식이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때 다른 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그냥 조용히 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반 아이들은 모두 난리가 났다. 동식이가 밖으로 뛰어내릴지도(그럴 일은 없겠지만 동식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몰랐고, 일단 선생님 눈에 띄면 우리는 또 단체 기합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친구 한 명이 내가 있던 방으로 황급히 뛰어와서 여차여차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발코니 쪽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동식아, 나다. 문 좀 열어봐.” 내가 말했지만 동식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했다.

 “동식아, 나다. 나한테까지 이럴 거가?"

 동식이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고, 반 친구들을 다 돌려보냈다. 그리고 동식이에게 가서 양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추우니까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제서야 동식이는 나와 발코니를 빠져나왔다.

 그 뒷이야기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별일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네 편의점에서 우연히 동식이를 만났다는 것이다. 동식이가 그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동식이를 바꿔주었다. 동식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반가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물론,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는 언제 한 번 만나자고 했지만 결국 그 이후로 동식이를 만나지는 못했다. 오늘따라 동식이가 보고 싶다.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러면 동식이는 내 이야기를 나름 진지하게 듣고, 유쾌한 답을 해주었을 텐데.

 아무튼 그가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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