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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소장 Oct 16. 2023

불편한 감정이 있는 곳에서 마음의 근육이 자란다

억압한 감정은 사이즈가 커지면 자신을 사로잡는다.

잠자리에 들거나 편안하게 쉬고 있을 때 의도하지 않았는데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가? 지현(가명)은 가끔 창피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회장 선거를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전교생 앞에서 연설을 잘하고 싶어서 준비를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단상에 오르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더듬더듬 연설하고 내려왔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당연히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친구들이 위로해 주려고 다가오는데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몸이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결국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요즘도 작은 실수라도 하면 바로 수치심이 느껴져서 몸이 확 움츠러든다.

      

그녀에겐 어린 시절 경험한 창피하고 초라했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속에 있는 그림자인 것이다. 자신의 잘나고 멋진 모습은 보일 수 있지만, 부족하고 못난 모습은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은 심리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핵심은 수치스러운 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태도가 초라한 감정을 그림자로 숨어들게 만든다. 이를테면 수치심, 죄책감, 열등감, 분노 같은 감정인데 누구라도 다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를 인정하기 싫고 무서워서 억압하고 회피하는 것은 무의식에 묻어두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없어지면 얼마나 좋겠나? 아마도 모든 사람이 밝고 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감정이 어려운 이유는 본인이 경험한 부정적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러니 부정적으로 느낀 감정도 나의 일부이다.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인 것이다.  

    

빛과 그림자를 보자. 하루 중 정오 12시는 햇빛이 가장 강하게 비친다. 그런 만큼 다른 시간대보다 그림자도 더 짙고 선명하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더 어두워지는 법이다. 모든 만물에 음과 양이 함께 존재하듯이, 인간의 성장에도 빛과 그림자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마음에도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한다. 밝은 마음이 많을수록 어딘가에 어두운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착하게 살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엔 삐뚤어진 마음도 있는 것과 같다. 항간에 교회엔 악마가 많이 살고, 교도소 위엔 천사들이 많이 산다는 말도 있다. 


사회성 좋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려면, 피곤하고 짜증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잠시 그 자리를 피한다거나, 적절한 핑계를 대면서 딴짓을 하는 것을 스스로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 때문에 자신의 지친 마음은 수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힘든 마음이 누적되면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림자는 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그림자는 없애야 할 상대가 아니라 허용하고 인정해야 힘이 약화된다. 

    


유진(가명)은 저녁 뉴스에 성폭력 사건이 보도되는 걸 보았다. 그날 이후 기억에도 가물가물하고 한 번도 다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과거 연인과의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한가해지면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른다. 마치 편안한 자신을 방해하려는 무엇이 자기 안에 있는 것 같다. 왠지 나만 죄를 진 것 같다. 어디 가서 고해성사라도 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머리로 생각해 보면 비정상적인 적도 없었고,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사건도 없었다. 보통의 연인 관계에서 있을 법한 일인데도 예전에 모든 일들이 다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그녀는 좋은 것은 선이요, 나쁜 것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며 살아왔다. 선악의 확고한 가치관 속에서 선의 기준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작은 실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럴 때는 ‘다 그렇지 뭐. 남들도 다 그래’라며 합리화하며 더 이상적 가치를 향해 밝게 살려고 했다. 남들이 보면 속에 맺힌 게 없는 서글서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무의식에는 그동안 외면해 온 감정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억압하며 눌러 온 감정들은 점점 덩어리가 커지며 자율적 힘을 가진 콤플렉스(complex)가 되었다. 


어느 날 뉴스를 본 것이 자극이 되어 콤플렉스 덩어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그녀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바쁜 일들이 끝나면 의식의 위로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 것이다.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선한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들이 덩어리가 커지면서 위협을 한다. ‘남들도 다 그래’라며 외면했지만 실제론 흑백논리에 있는 그의 마음속에선 소화되지 못한 것들이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 나의 조각들인 것이다.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해서 결국 자기 사업을 일궈내는 데 성공한 이가 있었다. 정훈(가명)은 30세 무렵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자신은 집안 형편 때문에 취업을 했다. 대학생인 친구들을 만나 재미있게 놀면서도 그 무리에 있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모임에 나가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지면서 서서히 친구들과 멀어졌다. 지금은 가정적으로나 사업적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 대학 이야기를 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이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사업 이야기를 강조하게 된다. ‘대학’이란 단어만 들려도 자기도 모르게 긴장되고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의 마음속에서 ‘대학’이란 단어는 아픈 상처다. 그의 마음속엔 아직도 대학에 못 가고 취업해야만 했던 서럽고 초라한 스무 살의 자신이 있다. 그 상처가 자극받는 환경이 되면 자동적으로 초라한 감정이 올라온다. 숨기고 싶고 인정하기 싫은 마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콤플렉스인 것이다. 

    

심리상담을 하면 밝고 활력있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림자에 뭉쳐 있던 에너지가 풀려나기 때문이다. 밝게 생각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할수록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감정을 수용할수록 활력이 높아진다. 주변의 믿을만한 대상에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은 역할을 한다. 부정하고 싶은 모습을 인정하면 마음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다. 혜진(가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왕따를 당한 뒤 사람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면 공격받을 것이라는 공포가 생겼다. 처음엔 잘해주던 사람도 나중엔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경험을 여러 차례 당하면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불편해도 남들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들어주는 것으로 대인관계를 유지해 왔다. 누군가 만나자고 하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도 자동반사적으로 약속을 한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매번 기분이 안 좋았다. 부정적인 느낌은 있는데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른 채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불편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자신이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웃으며 지나간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녀는 연인에게 이렇게나 많은 감정이 쌓여 있는지 스스로 몰랐다. 연인은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을 자주 언급했다. 그때는 저 사람 특성이려니 생각했다. 이번에도 연인에게 서운한데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그동안 서운한 감정을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하자 머릿속에 맨 먼저 이전 여자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떠올랐다. 사실은 다른 면들이 서운했다. 그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서운했던 마음이 이제야 느껴졌다. 그녀는 누구라도 불편하고 서운할 만한 일이었는데 자신의 감정을 몰랐던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나의 그림자가 묶여 있는 곳이다. 

    

습관적으로 감정을 억압하면 당연히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아차리거나, 서운한 것들이 많이 쌓여야 자신에게 인식이 된다. 억압한 감정은 사이즈가 커지면 자신을 사로잡는다. 한번 떠오르면 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생각하고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습관적으로 억압하면 습관적으로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 불편한 감정은 억압하고 외면하는 심리적 패턴이 습관화된 것이다.    

  

설혹 알아차리더라도 불편한 감정의 내용과 강도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자기감정에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생각하는게 맞는건지? 적절한건지?’등의 자기 검열을 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사소하게 물건을 사는 것도 자신을 믿을 수 없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피고, 여기저기 물어보며 정답을 찾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어도 남들의 선택이나 보편적인 방법을 따르게 된다. 중요한 진로조차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따라 하게 된다. 억압의 습관화는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존감을 낮아지게 만든다.   

    

심리상담을 하면서 가장 처음 묻는 질문은 ‘지금 이 시점(here-now)’에서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다. 현재 시점에서 내담자가 생생하게 느끼는 불편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음이 불편한 곳은 에너지가 묶여 있는 곳이고, 상담에서 다룸으로써 에너지가 풀려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들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곳이 바로 자신의 욕구(wish) 좌절이 있는 곳이고, 심한  경우에는 자아의 성장이 멈춘 지점이다. 학력이 전부가 아니라며 의지를 아무리 다져도 대학이란 단어가 떠오르면 자꾸 열등감이 느껴지며 마음이 걸려 넘어진다. 상담에서는 대학을 못 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안타깝고 서러웠던 그의 마음을 공감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 설 때 자꾸만 위축되는 걸 고치고 싶다면, 당당하게 생각하자고 결심할 게 아니라 자신 없고 초라했던 그 시절의 감정을 보살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좌절경험에 묶인 감정은 누군가로부터 공감받으면서 벗어날 수 있다. -3의 크기의 좌절은 -3의 크기만큼 좌절감을 겪어야 한다. -3의 크기인데 +5의 크기로 긍정적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왠만하면 좋게 생각하자’ ‘날 위해서 한 말인데 기분 나빠하지 말자’와 같은 말들은  사실 현실의 자기 경험을 왜곡하는 것이다. 가슴 아픈 감정들은 소화 시킨 후에 긍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 마음은 강제로 바꿔 생각한다고 바꿔지지 않는다. -3의 크기는 -3만큼 좌절하고, -10의 크기는 –10만큼 좌절한 후에 다음 단계로 일어서야 한다. 긍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마음이 힘들다면 힘들었던 부정적 감정에서부터 시작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심리상담에서 ‘here-now에서 왜 그렇게 힘든지’를 묻는 이유다.  

   



상담에 와서 사람들은 멋지고 괜찮은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상담자는 그런 욕구와 반대로 내담자가 불편해하고 외면했던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성장은 언제나 갈등과 상실의 지점에서 시작한다. 고통은 성장을 위한 전주곡이다. 고통에 직면하느냐 회피하느냐에 따라 다음 단계에서 마주치는 것이 달라진다. 중요한 건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아의 성장에 부정적 감정은 무시하면 안된다. 부정적 감정을 살피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불편한 감정이 들면 누군가에게 다 쏟아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속에 불편함들이 있는 것을 못견디는 것이다. 이는 좌절감정을 겪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뱉어서 없애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하거나, 잠을 자고 나면 다 잊는다고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힘든 마음을 음식이나 잠으로 덮는 것이다. 고통을 견딜 힘이 없는 것이다. 아파할 건 아파야 한다. 마음 성장의 아이러니다!   

  

심리상담을 받고 나면 밝아지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숨겨왔던 콤플렉스를 받아들임으로써 방어에 힘쓰던 에너지가 해방되기 때문이다. 억압하는 데 쓰였던 에너지가 삶의 원동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취약한 모습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라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에 더 이상 자신을 비난하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심리적 효과가뛰어나다. 엉킨 마음이 풀려나는 느낌,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 내면의 힘이 생겨나는 느낌 등 마음의 크기가 자란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공감하면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삶의 여정이 되면 좋겠다.      


HOW TO: 실천 방안     


1step: 관계에서 불편함이 느껴지는 마음을 찾는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곳이 심리적 에너지가 묶여 있는 곳이다. 습관적으로 감정 억압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내부 안테나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면 외부적 반응을 stop하고 머물러보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부 안테나의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자.     

 

2step: 불편함을 감정으로 명명한다.

불편함은 느끼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면 자기가 없는 것과 같다.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언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억울함인지? 창피함인지? 슬퍼지는지? 등을 언어로 명명하는 과정에서 모호한 불편감들이 선명해진다. 주관적인 자신이 서는 과정이다.     


3step: 안전 대상일 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한다.

불편감을 일으킨 감정이 선명해지면 이젠 표현하는 연습을 하자. 자기 마음을 정확히 알면 상대나 상황에 따라 표현의 크기나 내용을 조절하면 된다. 유연하게 조절하기까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머릿속에서 혼자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과정은 자기 틀 안에 갇혀서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실천하고 피드백을 경험하면서 본인의 예상 밖의 새로운 시야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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