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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소장 Oct 09. 2023

수다를 떨 안전한 대상이 필요한 이유

충분히 의존해야 충분히 독립할 수 있다

   

지민(가명)에게 첫 기억을 물어보자, 그는 세 살 무렵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가 벽을 뚫고 집을 나갈까 봐 무서웠다 했다. 그렇게 엄마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들 때면 상상 속의 어떤 인물에게 위로받았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그는 상상 속 인물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대어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그토록 바랐던 전업 작가가 되면서 드디어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되는데 책상 앞에 앉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한 줄도 쓸 수 없다. 왠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너무 심하다. 오랜 시간 꿈속에서도 그토록 열망했던 작가의 멋진 모습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됐지만, 작가로서의 그는 상상했던 것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감만 커진다. 어렸을 때부터 불안할 때면 상상 속으로 회피했는데, 또다시 도망치고만 싶다.     


지민에게 엄마는 믿을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자신을 버리고 떠날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마치면 엄마가 사라질까 봐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많이 울었다. 편안하게 믿고 의지해 본 경험이 적었다. 엄마에게 집착하거나 너무 불안하면 책상 밑 공간으로 들어가 상상 속 인물과 대화하는 게 안심이 되었다. 지민에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무섭지만 혼자 버티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불안 정도는 다르지만 인간 정신은 불안으로부터 시작한다. 생명의 시작인 태아는 엄마의 배 속에서 보호받으며 성장한다. 10개월간의 태내 환경에 있다가 어느 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영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실존적인 어려움을 누군가가 보호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소나 돼지, 말과 같은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젖을 찾아가는데, 영장류라 할 수 있는 인간은 타인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의존적 상태가 길기 때문에 오랜 양육 기간이 필요하다. 그만큼 신체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외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은 취약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지지와 격려를 받으면서 자란다.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는 것이다. 앞의 장에서 언급했던 자아 팽창과 위축상태를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자신의 마음 심지를 만들어 간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미약한 아이의 존재를 한껏 부풀린다. 별것 아닌 시도에도 주변에서 힘을 빵빵하게 보태주는 것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숟가락질했을 때 밥알이 다 흐트러지더라도 엄마, 아빠의 지지를 받으며 더 잘해보려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호기심을 갖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또한 처음 해본 젓가락질에 반찬을 다 떨어트려도 웃으며 ‘그럴 수도 있어’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필요하다.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너무 실망하거나 질책하면 아이들은 좌절경험이 너무 큰 실패로 받아들이게 된다. 실패경험이 쓰라린 좌절로 느껴져서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자리 잡는다. 사소하지만 작은 경험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이면서 자아의 힘이 된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르네 스피츠(Rene Spitz)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고아가 된 아이들을 연구하였는데, 생후 몇 개월간 모성결핍을 겪는 아기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충분한 음식과 청결한 양육 환경이 제공되고 있는 보육원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기들은 독특한 증상을 보였다. 생후 2개월째부터는 체중이 줄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3개월째부터는 무표정하고 무기력해지다가 먹을 것을 주어도 받아먹지 않았다. 정서적 교류가 6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경우 아이의 운동 발달이 저하되고 정신적, 신체적 발달이 지체되었으며 사망률도 높았다. 91명의 고아 중에서 생후 첫해에 16명이 그 이듬해에는 7명이 죽었다고 했다. 신체적 돌봄 외에 심리적인 안전감을 제공받지 못하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양육환경은 자아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이 자기욕구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환경이 의존할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조금만 울어도 부모가 무섭게 화를 내거나, 아이의 눈에 부모님이 너무 불쌍해 보이거나, 매일 부모님이 싸우는 등의 경험을 많이 하면 아이들은 밖이 불안하다고 느낀다. ‘지금은 너무 위험하니 난 가만히 있어야 해’라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다. 아이들의 본능적 특성인 흥분성과 충동성을 억누른다. 아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본능인데 말이다. 그것을 숨죽여야 하는 것이다. 움직이고 떠들고 싶은 본능은 억누르고 외부환경이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심리적 성장에 제한을 받는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외부환경이 억압적이고 불안하면 자신의 욕구보다 남들 눈치를 더 보는 것과 같다. 타인에게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마음속에 자기 생각이 있어도 집중할 수가 없다. 자기답게 살기 어렵다. 그렇게 외부로 소통하지 못한 마음은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고 결국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하거나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주말이면 성준(가명)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과 춤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얼마 전부터 술을 마시면 충동적인 행동이 통제되지 않아서 결국 상담실을 찾았다. 회사에서는 꽤나 인정받는 직원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밝고 활발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편인데 말이다. 상담에 온 그는 힘들었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힘들어한다. 그때의 이야기뿐 아니라 감정에 관해서도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온몸을 숙이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린다. 여러 번의 심리상담을 하며 조금은 말할 용기가 생겼는지 그때의 사건으로 진짜인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름 성취를 하며 살았으나 창피하거나 한심한 모습은  외면하고 살아왔다. 위축되고 좌절했을 때조차도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 받아들여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라며 모두 다 없던 일로 생각했다. 자라면서 그의 엄마는 그가 좌절을 느끼거나 상처받은 나를 더욱더 혼냈다. 엄마의 힘듦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가 힘들다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리적 독립과 관련해서 ‘충분히 의존해야 충분히 독립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충분히 의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독립하려는 건 본능적인 태도다. 안전한 대상에게 충분히 의존해 본 경험이 나중에 심리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저력이 되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아기 새가 충분한 돌봄을 받으면 스스로 둥지를 떠나 하나의 독립체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상담에 와서  어릴 때는 씩씩하고 의젓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누구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좌절이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다. 좌절 경험을 어떻게 느끼고 처리하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중학교 때 숙제를 안 해서 다음날 학교에 가기 싫어서 뭉그적거리고 지각을 하면 큰일이 벌어진 것처럼 불안해하는 엄마가 있었다. 본인보다 더 힘들어해서 아침마다 혼이 나고 갈등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엄마의 개입은 여전했다. 불안이 높은 엄마가 좌절된 그의 경험을 짊어지는 바람에 온전히 겪지 못한 것이다. 그가 상담실에 온 이유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왔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버텨주는 지지가 있어야 좌절을 대면할 힘이 생긴다. 또 다른 예로, 실수할까 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처음 하는 일인데 실수가 생기면 스스로 못 견딜 것 같다고 말한다. 좌절감을 너무 크게 느끼면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접게 된다. ‘그럴 수도 있지! 처음 해 보는 일이잖아!’라며 스스로가 본인의 지지자가 되면 좋겠다.      


누구나 과거를 뒤돌아보면 바보 같았던 흑역사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중에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힘든 마음 자체를 꽁꽁 숨겨놓아 스스로조차도 없던 일로 생각하려 한다. 내가 나의 감정을 억압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외면당한 마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에너지를 붙들고 있다. 외면당한 감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기나 활력 같은 본능에너지는 점차 잃어간다. ‘부정적인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밝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며 살자’는 말도 좌절된 감정을 억압하라는 말이다. 일시적으론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억압을 많이 하면 어느 날부터는 우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찌질함도 알고 힘든 것도 느껴야 현실에서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갈 수 있다. 자아의 힘은 긍정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부정적 감정을 소화하는 데서 나온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을 나눌 대상이 필요하고 스스로가 자기편이 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성숙 과정에는 함께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대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느끼는 것으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사회적으로 고립될수록 정신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릴 때는 안전한 주양육자에 의지해서 불안을 감소시키고, 사춘기에는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우리들’이란 소속감으로 불안감을 덜어내야 한다. 안전한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이 덜 두렵게 느껴진다. 그래야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자신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좋고, 무엇이 싫은지를 구분하면서 자신을 찾아나간다.      


심리상담자의 역할은 ‘마음속에 있는 취약한 어린아이’를 돕는 것이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운 아이가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낼 수 있게 안전 지지대 같은 역할을 한다. 내담자가 평가에 대한 두려움 없이 힘들었던 속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심리상담에서 가장 중요하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와 같은 공감반응을 받으며 좌절된 감정을 대면하게 된다. 안전한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피드백을 받으며 표현조차 어려웠던 부정적 감정들을 만난다. 혼자서 부끄럽게 느꼈던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생각이나 감정이 외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성장한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까? 그렇다. 힘든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회피하면 문제가 더 꼬여서 상황이 복잡해지는 경우들이 있다. 당장은 힘든 것들을 외면해서 좋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불안함이 뭉근하게 남아있다. 주변 사람에게 속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만으로도 엉켜있던 마음속에 심리적 여유 공간이 생긴다. 문제를 건강하게 해결할 가능성이 커진다.    

  

상담에서 “그때 마음이 어땠나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하나 이상의 대답을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물, 사건에 대해서 조차도 한가지 마음만 있지 않다. 친구가 만나자고 할 때 좋기도 하지만 귀찮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서도 밉기도 하지만 연민도 있는 것처럼 비중이 다를 뿐이지 여러 감정이 공존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은 어느 것 하나 명백하게 단정 짓기 어려운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불확실한 마음도 누군가에게 표현하면 좀 더 선명해지고 자신의 입장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더 낫다.   

  

자아의 발달과정에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고 수치심이 생기기도 한다. 사춘기 때는 또래 친구들 속에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귀찮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관계 속에서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자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다. 성장 과정에선 누구라도 중요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기를 확인한다. 더욱이 취약할 때는 타인의 피드백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비난 없는 안전한 환경이 중요하다. 누군가와 함께 지지배배, 지지배배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란 것은 참 오묘하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내부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한마디 말로 표현하면 서로 편해질 일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말하지 못했던 한마디의 말이 마음속에 돌아다니면서 100마디, 1000마디의 말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진다. 마음속이 그것으로 가득 차서 결국 사로잡히는 상태가 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생각이 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100마디, 1000마디의 말로 확산된 것은 너무 복잡해서 상황에 맞게 적절한 반응하기 어렵다.      


평가받지 않는 안전한 상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팽창된 자기 모습도 보고, 칭찬받고 싶었던 자신도 보고, 서운한 마음도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오해가 풀리면서 엉켜있던 일그러진 마음도 풀어진다. 안전한 대상과 함께하는 지지배배의 시간들의 경험은 심리적 에너지가 살아나게 도울 것이다.  

    

HOW TO: 실천 방안      


1step: 평가하지 않을 것 같은 대상 찾기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숨기게 된다. 혹시 우리 마음 안에도 ‘외부사람들은 누구라도 날 평가할 것이다’란 고정관념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내 안에 쌓아놓은 방어벽 때문에 친밀한 관계로부터 점차 멀어진 것은 아닌지 체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2step: 속으로만 생각한 것을 겉으로 말해보기 

나답게 표현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걸 다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대단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란 부담을 갖지 않으면 좋겠다. 친구들과의 소소한 대화에서 내가 생각하는 걸 표현한다면 주체로서의 경험이 될 것이다.      


3step: 즐거움을 경험하기. 

‘표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here-now에 집중함으로써 친밀감도 느끼고 즐거운 경험을 통해 에너지를 회복하는 힐링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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