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감정들은 언어로 표현하면 선명하게 인식된다
심리상담을 오래 하다 보면 초기상담 때 내담자의 말투를 체크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주어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본다. 일반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때의 주어는 ‘저는’ ‘나는’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을 주어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꽤 많다. 상담에 온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님이나 상대방이 주어인 경우들이 꽤 있다.
“정상은 아닌 것 같아요. 남들이 봐도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엄마가 상담을 받는 게 좋겠다고 해서 왔어요”
“친구들이 저보고 남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고 해요”
모두 다 타인이 주어인 문장이다. 자신의 어려움을 마치 남의 일처럼 감정을 제외하고 말하거나, 아니면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했다는 식의 타인 입장에서 설명한다. 마음이 어리거나 공허감을 호소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이 어떻게 했는가에 더 초점을 두고 말한다. 마음이 어리면 주체의 입장이 약하므로 자신을 중심에 놓고 말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공허한 것도 마찬가지다. 내면이 비어있다고 느끼면 주체의 입장을 알기 어렵다. 자신을 주어로 놓고 말하기 어려운데 감정을 표현하는 건 더욱더 힘들 수밖에 없다.
민호(가명)는 항상 친구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는 또래 친구들보다 알짜배기 정보도 많이 알고 사회생활에서 갖춰야 할 팁도 많이 안다. 마음도 따뜻하고 순수해서 그를 롤 모델로 생각한다는 친구도 여럿 있다. 그런데 민호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올 때는 거의 도움이 필요할 때다. 친구들은 여행을 가거나 놀러 갈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가고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민호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없어서 항상 외롭다고 느낀다. 상담에서 그의 주관적인 입장을 물으면 “글쎄요. 그냥 그렇죠. 뭐” “그냥 그랬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냥 그렇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화가 뚝 끊기는 것 같다. 그는 말할 때도 주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상황 설명이나 외부 정보도 잘 알고, 객관적인 판단도 뛰어나고, 공감도 잘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를 잘 못한다. 자기 말을 하는 건 사실 인간의 본성인데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너무 어렵다고 토로한다.
인간 본성의 기초는 집단적 무의식에 있다고 칼 융은 말했다. 집단적 무의식에 있는 내용들은 하나의 종이 보존되기 위해 대대손손 유전되어 온 선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꿀벌들이 꿀을 따오는 방식이나 육각형 모양의 벌집을 짓는 생존 전략은 누가 가르쳐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 꿀벌이란 종 모두에게 본능적으로 내재해 있다. 집단적 활동을 하는 벌들은 누군가 꿀을 찾으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원형 춤을 춘다. 춤의 형태를 보면서 동료 꿀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다른 꿀벌들에게 꽃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꿀벌들은 꽃의 거리가 먼 곳에 있을수록 배를 빠르게 흔들고 8자를 도는 횟수는 줄고, 가까운 꽃일수록 배를 천천히 흔들고 8자를 도는 횟수는 많아진다. 또한 시계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꽃의 위치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생존을 위한 본능이 존재한다. 스스로 독립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태도와 행동이 있다. 아기들은 배가 고프거나 무언가 불편하면 크게 울어서 주변 사람이 자신을 돌보게 만든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되면 자동으로 아기를 돌보려는 특성이 있다. 내재된 모성 본능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아기들은 모성의 돌봄을 받으며 인간적 면모를 갖춰 나가게 된다.
아이들의 생김새도 주변 사람의 돌봄을 유발하는 본능적인 생존 전략이다. 아이들의 눈과 코, 입을 보면 동글동글하다. 몸도 포동포동하니 귀엽다. 아이들은 감정도 모두 몸으로 표현한다. 좋으면 날아갈 듯이 뛰면서 온몸으로 좋아하고, 싫으면 온몸을 다 찡그려가며 운다. 아이들의 본능적 욕구는 주변의 지지와 지원을 받게 유발하는 특성을 갖고 성장한다. 이렇게 주변으로부터 지지받은 느낌은 내면의 힘을 강화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본능을 존중받으며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생긴다.
또한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기질에 따라 에너지의 양과 강도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시끄럽게 자신을 표현한다. 마치 엄마 제비의 관심과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새끼 제비들은 어미가 나타나면 엄청 시끄럽게 ‘지지배배’거린다. 새끼제비들이 “내가! 내가!”를 외치는 본능적인 태도처럼 인간에게도 지지배배거림은 중요하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엄마가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들이 어떻게 했어”라며 타인이 주어인 문장을 말한다. 그렇게 타인 중심의 말들을 하다가 점차 자기중심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이다.
정신의 주체가 확립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것을 많이 말하지 못한다. 상담을 하다보면 내담자가 어떤 주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아는 것이 많더라도 주어 사용에 있어서 타인 중심이 많을 때는 심리적으로 덜 성숙한 것일 수 있다. 마음이 성숙할수록 자신이 주어가 된 문장을 잘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릴수록 관계에서 자기 행동은 잘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나에게 한 부당한 행동만 생각하기 때문에 억울함이 많다. 그러나 마음이 자라면 자신의 입장과 타인의 입장을 볼 수 있으므로 성장할수록 억울함을 덜 호소한다. 본인도 자기모습을 잘 아는 것이다. 이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이다. 여러분 중에 혹시 매사에 억울함이 많다면 한번쯤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음은 자아의 힘이 생기기 전까지 위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자기가 좀 잘하는 것 같으면 빵빵하게 바람이 들어간 풍선처럼 어깨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 같고, 모든 것을 다 이룰 것 같은 상태로 팽창된다. 반면에 조금 잘못해서 혼이 나면 풍선에 바람이 다 빠져서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된다. 아이들은 과잉 팽창된 자신과 위축된 자신을 둘 다 경험한다. 극단적으로 위축과 팽창을 오가는 모습이 당연하다. 그러니 감정이 양극단으로 오름내림하기에 불안정한 것이다. 이 또한 당연한 현상이다.
마음의 힘을 키우기 위해선 양육자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주양육자는 과잉팽창된 상태도, 위축된 상태도 지지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로 담아내야 한다. 그렇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아이들이 한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의 표현되는 모습 자체로 수용하라는 말이다. 잘한 것도 받아들이고 좌절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아이는 몸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말과 감정도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불안정성이 기본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여기저기 부딪치고, 이야기도 하다가 관심사가 금세 딴 곳으로 넘어간다. 마음 안의 충동적인 생각과 사고들이 잦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불안정하지만 아이의 마음이 잘 표현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어른이 되었는데도 충동성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면 자신의 마음 표현이 어려운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항간에는 수다스러운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운다는 말이 있다. 부모들은 아이의 작은 표현에도 “그랬어?”, “싫어, 좋아?”, “어때?” 등의 반응을 통해 아이의 표현을 더 촉진한다. 부모의 지지적인 환경에서 아이는 쫑알쫑알 느끼고 생각한 것을 말하면서 마음이 점차 선명해진다.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이는 어른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면서 자신을 인식한다. 또한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얼마 전 TV에서 가수 이효리가 제주도에 내려가서 지낸 시간이 자신도 몰랐는데 우울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우울한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모호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지지배배 말하면서 선명하게 인식된다. 그래야 자신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을만한 대상에게 소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지지배배’ 말할 대상이 중요하다.
자아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주변 평가에 제한받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만들기 위함이다. 지지적인 환경에서 팽창된 나를 드러내기도 하고, 두렵고 위축된 나를 표현하면서 자신을 경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잘난 모습도 인정하고, 찌질한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작고 소소할지라도 말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야 자아가 자란다. 그래야 통제되지 않는 충동성에 휩쓸리지 않는다.
소은(가명)은 대인관계를 잘하고 싶은데 어느 자리든 자신이 끼어들면 분위기가 싸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 같아서 고민이다. 친해지고 싶은 동기가 있었다. 그날은 여러 명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직원이 동기에게 말을 시키자 갑자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관심받는 게 부담스러워 딸꾹질하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더니 동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후 동기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 같다. 궁금해서 튀어나온 말인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자신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면의 힘이 약하면 충동적인 말과 행동을 조절하지 못한다. 관계의 욕구가 큰 소은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자라면서 자신을 표현해 본 경험이 매우 적었다. 마음의 힘을 키울 조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상담에서는 내담자가 말한 주제에 대해 상담자가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라고 관심을 기울이면 내담자는 그때의 이야기에 머물게 된다. 마음도 그때에 머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부연해 설명하면서 당시에 느꼈던 힘든 마음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마음속으로 느꼈던 어렴풋한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마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소은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제 문제가 무엇인지 정말 고민이 많았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마음에서 울컥거리는 게 많아요. 그동안 제가 잘 몰랐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마음이 정리돼서 편해졌다고 덧붙였다. 말할 수 있게 돕는 것만으로도 상담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았다’는 이들도 상담을 받으면 마음속에 서운하고 억눌린 감정이 그토록 많은 것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해지려면 비난이나 거부당할 염려 없이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이 필요하고 의존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친구나 연인이 중요한 이유다. 또한 삶을 살아가는 데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쓸모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에게 혼이 났다는 내담자도 있었다. 걱정하거나, 농담하거나, 부정적인 말은 집안에서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작고 별것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가 마음의 힘을 키우는 시작점이다.
‘글 속에도 글이 있고, 말 속에도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겉으로 표현된 것 이면에 다른 의미가 있기도 하고, 또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 심리상담도 이와 비슷하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겉껍질을 까면 속 양파가 나오는 것처럼, 나를 찾아가는 심리상담 여정은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심리적인 어려움이 클수록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욕구나 기대, 불만 등을 말로 표현해 본 적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상담자는 질문을 잘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내담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기 마음을 아는 것은 양파 껍질을 까는 작업과 같다. 마음은 양파처럼 한 겹, 한 겹씩 덮여 있어서 내면의 안테나를 작동시켜 들여다보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표면적인 마음 아래 다른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겉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점차 자기 마음을 아는 것이 어렵다. 어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다층적이고 복잡하고 양가적인 마음이 동시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범한 마음 옆엔 무섭고 불안한 마음도 있고, 정의로운 마음 옆에 이기적이고 귀찮은 마음도 있다. 이처럼 마음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아이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지지배배’거리며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입으로 말하고, 내 귀로 들으며, 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한다. 믿을 만한 대상이 필요하다. 부모님이어도 좋고 친구나 연인, 남편, 아내도 좋다. 시시껄렁한 소소한 이야기도 좋고, 묵직한 걱정거리도 좋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가게 된다. 결국 표현해야 나를 알 수 있다.
HOW TO: 실천 방안
1step: 믿을만한 안전한 대상에 대한 기준을 점검해 보자.
상담을 하다보면 주변 사람들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다는 관계를 점검해 보면, 개인이 경험한 실제가 아닌 자신만의 방어벽이거나 모호한 상태인 경우도 있다. 낮은 수위일지라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관계를 찾아보자.
2 step: 작고 사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음속 깊이 숨겨놓은 상처를 말하려 하지 말자. 그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기존의 해왔던 모습에서 작은 변화를 시도해 보자. 평소 모습에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정도의 용기를 내보자. 긍정적인 마음도 좋고, 부정적인 마음도 좋다. 양파 속을 전혀 안 보여주던 것에서 겉껍질 하나 벗긴 정도를 남들에게 표현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3 step: 사소하지만 마음속 불편함을 이야기한다.
자아는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성장한다. 긍정적인 부분으로 자신을 표현해서 좋은 피드백을 얻었다면, 슬슬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옮겨가자. 상대의 입장과 다른 것도 표현해 보고, 상대로 인해 불편한 마음도 조금씩 내어놓는 훈련을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 보자. 부정적 감정을 표현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작은 성공경험을 통해 마음이 뿜뿜!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