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그것은 베이컨의 가상장치처럼 결코 변명하지 않으며, 결코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49p)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 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 읽기, 창장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작품: 항상 상징적인 것/비상징적인 것,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 법적 구조로 해석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 시니피에이다.
즐거움의 텍스트: 문화에서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 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전, 문화, 섬세함, 행복감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 시간표,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바르트에게서 세부적인 것이 중요한 까닭은 텍스트란 무엇보다도 즐거움의 대상이며,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가장 덜 오염된, 따라서 가장 생명력이 긴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8~14p)
크리스테바의 표현에 따르면 발생 텍스트는 변화, 환원, 짜집기 등으로 고정된 시니피에(의미, 개념)가 아닌 끊임없이 생산을 의미한다. 반면 현상 텍스트라는 것은 단일, 고정, 총체적 의미의 집결체로, 이는 로고스, 이성중심주의적 글쓰기를 말하는데 바르트는 이런 글을 작품(oeuvre)라 하고 이런 글은 소비의 대상, 단일하고도 안정된 기호체계라 말한다. 로고스적 글쓰기라는 것은 만물의 근거가 있어 세상만사가 어떤 정해진 것을 논리적으로 나열하는 행동인 것처럼 글을 작성하는 것이다. 편협한 개발 서적 같은 것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모든 개발 서적이 그렇지는 않다)
이 문장이 발생 텍스트적 의미를 내뿜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이컨의 가상 장치란 우리의 지식은 관념들을 전제 삼는 연역추리로 인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된 사실들을 집합하여 정리하는 귀납법에 달렸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 연역추리적인 글쓰기라는 게 논리나 방법론에 치우친 글을 뜻하는 듯하다.
작가 중심에서 독자로의 이동을 말한다. 데리다의 탈구축에서 가져온 개념으로 보이는 이 개념은 화자가 아무리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려 해도 결국 자신의 생각을 완벽히 청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독자(청자) 중심주의를 주장하는데, 독자 중심주의는 각각의 독자가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정답인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의 개념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로고스적 사고관이며 일자적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진짜로 그런 것 같다. 처음 글을 연습할 때 내 의도를 어찌 완벽히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지만 결국 그것은 불가능했고 또 누구도 불가능하다. 지금 글이 많이 바뀌어 가는 것이 그것을 이해하면서 부터인 것 같다.
이 부분은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발생 텍스트적 글쓰기는 일자관을 가진 글처럼 글에 작가의 정답이 있어 그 정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부정하는, 그런 의미로 생각된다. 즐거움의 텍스트라는 것은 독자가 어떤 해석을 하든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