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
자신의 마음속에서 통합이 아닌, 다만 논리적 모순이라는 그 오래된 유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든 장벽이나 계급∙베타성을 파기하는 한 개인의 허구적 이야기 양립할 수 없다고 알려진 언어라 할지라도 모두 뒤섞으며, 비논리적이다∙불충실하다는 비난을 모두 묵묵히 감수하며,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와 합법적인 테러 앞에서도 무감동하기만 한 사람. 그런 사람은 학교나 수용소, 일상 대화 등이 이방인으로 취급할 우리 사회의 비열한 자가 될 것이다. 누가 수치심 없이 모순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런 반영웅적인 인물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을 취하는 순간의 텍스트의 독자이다. 그리하여 성서의 옛 신화는 역전되며 언어체의 혼란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닌, 주체는 서로 나란히 작업하는 언어의 공존에 의해 즐김에 이르게 된다. 즐거움의 텍스트, 그것은 행복한 바벨탑이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50~21p)
즐거움, 즐거움의 텍스트
즐거움과 즐김: 바르트의 텍스트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그렇지만 이 둘 사이의 구별은 저자가 말하듯이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즐거움(plaisir)이란 육체적∙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jouissance)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 이런 용어상의 모호함과 또 즐김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완결된 산물이 아닌, 즐기는 과정 자체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옮겨 보았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51p)
바벨이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기보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기 위해 존재했던 고대 도시를 그대로 의미하는 듯하다. 이것도 모순이려나? 겹겹의 시니피앙을 추구하면서 바벨이라는 의미적 단어를 사용하니 말이다.
로고스적 글쓰기려나? 뭐든지 뚫을 수 있는 창, 뭐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와 같은 모순적 글쓰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간혹 글을 쓸 때 지나치게 논리적이려다 글이 꼬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글쓰기는 결국 화자의 논리를 내비치기 위한 글이기 때문에 즐거움의 텍스트에 부합하지 않는다.
화자 중심에서 완전히 독자 중심으로 옮겨온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 글이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결국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독자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죠. 1960년대 귀스타브 랑송은 프랑스 비평계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도 불문학 전공자는 <<프랑스 문학사>>라는 책을 꼭 읽는다고 하네요.
귀스타브 랑송은 작품을 비평할 때 작가의 사적 디테일에 주목했습니다. 어떤 작가가 어떤 직업의 부모 사이에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아무튼 작가의 신변 같은 것을 다 조사해서 그것을 문학비평과 연결시켰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그것이 아니다. 텍스트는 텍스트고 사람은 사람이다. 이미 텍스트가 던져진 순간, 그 텍스트의 주인은 저자가 아니다. 그 저자와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해야 한다.'
(고종석의 문장 1, 고종석, 29p)
이처럼 글쓴이의 주체는 완전 사라지고 독자의 텍스트만 남는 것입니다.
정확하진 않은데 <<신화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합쳐 하나의 기호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역전되는 것을 말입니다.
신화론
텍스트와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작업으로 즐거움 보단 즐김이란 단어를 사용한 걸 봐선 텍스트와 독자 사이 무언가를 생성해 내는 동사적 의미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즐김(jouissance)'이란 단어가 좀 애매한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로 인해 내 안에 무언가 발생하는 알 수 없는 감정들, 지속적인 그런 감정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작 바르트 조차도 그 담론은 불완전할 것이다라고 하니.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즐거움의 텍스트로 얻는 것들이 바벨탑처럼 점점 쌓여간다는 의미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