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만약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혹은 이 말을 즐겁게 읽는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는? 즐겁게 쓰는 일이 작가인 나에게 독자의 즐거움을 보장해 줄까? 전혀 아니다.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인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공간, 모든 것이 끝나지 않기를, 놀이가 저기 있기를.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51~52p)
욕망의 변증법: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용어, 주체성의 훼손된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타자의 욕망보다 요구에 더 집착하게 되는데, 사람은 보통 욕망은 감춰두지만 요구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이런 경우 분석 주체(주체성이 훼손된 사람)의 요구를 좌절시켜 욕망을 끌어내는 단계 까지가 욕망의 변증법 단계라 한다.
한 남자가 여성에게 거부 당했을 때, 여성을 향한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그 욕망은 여성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거부적 행위에서 나온다. 욕망은 대상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 우리가 무한히 욕망하는 이유는 욕망에는 대상이 없어서다. 이때 정신이상자에게 정신분석가가 하는 일은 정신이상자의 욕망을 치료사에게 전이시키고, 치료사가 자리 이동(신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 자리 이동) 하면서 정신이상자가 착각하는 욕망을 주체로서의 욕망으로 끌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정확한 내용은 링크로 확인해 주세요 ^^)
욕망의 변증법
<<텍스트의 즐거움>> 책을 보는 사이 <<소소한 사건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시니피에적 표현이 상당히 배제되어있다. (완벽히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책은 자신이 겪은 현재의 일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상황을 추측하거나 상상하도록 한다. 나는 솔직히 이 책이 더 어렵다고 느꼈는데, 소설이나 에세이를 거의 읽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 시대상, 문화가 지금 우리 문화와 많이 다른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바르트가 말하는 그런 텍스트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그 방법이 내게 적절한가를 고민하게 된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즐겁게 쓰인 글은 겹겹의 시니피앙이 쌓인 문장, 작가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 혹은 설명하려 하지 않고 독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문장.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에게 생기는 즐김의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이 앞 문장과 엮어 설명되어야 하겠는데, 글을 쓸 때 나는 독자를 찾아내고 즐겁게 하기 위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독자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 독자는 대상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그런 독자를 찾아내야 하는 행위 자체가 작가의 욕망이 되고 작가의 즐김이 되는 것이다. 그 독자를 찾는 행위, 그것을 공간이라 표현했고, 그런 공간은 정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동적인 움직임의 즐김이다. 독자들을 찾아내는 행위, 찾아내고자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전이시키는데 있어 욕망의 변증법이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한 텍스트를 내민다. 그 텍스트는 나를 지루하게 한다. 그것은 옹알거린다고나 할까. 텍스트의 옹알이는 글쓰기의 단순한 필요의 결과에 의해 생겨난 언어의 거품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변태/뒤집음이 아닌 요구 안에 있다. 필사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쓰면서 젖먹이의 언어를 취한다. 강압적이고도 자동적인 냉담한 언어, 흡기음의 자그마한 유출. 그것은 목적 없는 젖빨기의 움직임이요, 미식가의 즐거움이나 언어의 즐거움을 산출하는 구강성과는 차단된 미분화된 구강성이다. 당신은 내가 읽어 주기를 바라며 내게 도움을 청하지만, 당신의 눈에 나는 그 무엇의 대체물도 아니다. 나는 어떤 형상도 갖고 있지 않다. 당신에게 나는 육체도 대상도 아닌 다만 하나의 장, 전열기구에 불과하다. 결국 당신은 이 텍스트를 모든 즐김 밖에서 썼다고 말할 수밖에. 요컨대 텍스트/옹알이는 욕망이나 신경증이 형성되기 이전의 모든 요구가 그러하듯이 불감증의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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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작가는 이렇게 말하리라. 미치광이는 될 수 없으며, 감히 건강하다고 말하지는 못하며, 그래서 신경증에 걸린 것이라고.
당신이 쓰고 있는 텍스트는 그것이 나를 욕망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 증거는 존재한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언어 즐김의 학문이며, 그것의 카마수트라이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52~53p)
필사자: 저자의 개념이 무엇보다도 실증주의적이고도 합리주의적인 정신에 의거한 것이라면, 필사자는 그 자신의 텍스트를 결코 초월할 수 없는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이다... 작가란 심리적인 주체가 아닌 선행하는 글쓰기를 베끼며 변형하는 자라는 점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쓰기를 실천하는 자로서의 필사자는 말하는 자, 즉 화자와 대립된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31p)
변태/뒤집음: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의 즐거움은 기존의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인 것으로서, 규범이나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변태적인 성행위와도 흡사한 것으로 간주된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김희영 옮김, 52p)
바르트는 신경증과 불감증을 대비시켜 즐김의 텍스트와 옹알거리는 텍스트를 비교하려는 듯하다. 신경증에서는 어떤 욕망이 해소되는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며 텍스트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쾌락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불감증은 무엇이 결핍, 즉 통제에 의해 전이 속에서 생성되는 쾌락을 차단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옹알거린다는 표현이 좋지 않게 쓰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욕망의 변증법에서 정신이상자가 욕망이 아닌 요구에 집착하는 것처럼 옹알거리는 텍스트는 표면에 드러난 요구를 말한다. 변태/뒤집음은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텍스트를 극적이게 표현하려는 의도겠다. (창의적이라는 표현은 구체성이 떨어지지만 대중적으로 더 알려진 단어인데다 철학에선 창조, 창의란 단어를 사용하는 걸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아마 철학의 사유 자체가 모두 그런 행위인 이유인 것 같다.) 즉, 옹알거리는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변태/뒤집음적 행위를 끌어내지 못하게 하는, 마치 무슨 정답이 있는 마냥 이야기하는 그런 텍스트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육체도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욕망을 일으키는 어떤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전열기구는 그냥 필요에 의해 존재할 뿐이지 어떤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비유한 것 같다. 결국 그런 텍스트는 즐김 밖에서 작성된 것이다.
불감증이란 정신분석에선 성행위에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의 반응 결핍증을 말한다. 또한 신경증은 욕망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상태이다. 욕망의 지속은 결핍 상태에서 이루어지는데, 정신분석학 내용에선 쾌락의 통제가 지나치게 강한 이유로 신경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바르트는 정신병의 의미로 신경증을 사용한 듯하다. (번역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정신병의 치료 과정에서 욕망이 고착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전이 시키는 단계가 있는데, 텍스트도 그와 같이 다양한 것들을 끊임없이 욕망하도록 해야 하나 그러지 못한 요구 단계로만 이루어진 고착된 상태를 말하고자 불감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완전한 광인은 아니되 정상도 아닌 정신병의 상태.
텍스트가 단순히 전시되는 것이 아닌, 즐김의 작용으로서 존재해야 하는데, 독자에게 욕망의 끊임없는 전이를 일으킴으로써 즐김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