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더는 못하겠어"
"나는 할 만큼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내 맘을 왜 모를까?"
"내가 너한테 많은걸 바란 게 아니잖아! 왜 내 마음 몰라줘?!"
"너는 왜 부모 마음을 몰라주니?"
사랑에 의해서든 명예에 기대해서든 어떤 사람에게 은혜(선행)를 베푼 사람은, 만일 그 은혜가 보람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슬픔을 느낄 것이다.
(에티카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 정리 42, 스피노자, 추현영 옮김, 148p)
내 멋대로 읽는 논어지만 스피노자의 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번 주제가 감정 소비에 대한 이야기인데, 논어에는 딱 들어맞는 문구가 없더라고요. 공자는 참 일관적입니다. 그저 자신을 더 갈고닦으라고 하죠.(ㅎㅎ)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에 어찌 심신단련으로만 감정을 다스리겠어요. 자신을 갈고닦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준비한 이야기는 감정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작성해 봤습니다.
논어에서 딱 맞는 구절을 찾기 어려워 스피노자 에티카의 한 구절을 가져와 봤는데요. 스피노자는 철학을 수식 다루듯 법칙과 공리에 의해서 작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유인지 마음의 수입과 지출이라는, 정량적이게 끔 보이게 하는 이 주제와 다소, 조금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정량적이다'라는 것은 실제로 수치화를 했다기 보단 감정을 세분화했다는 점이 유사한 부분인 것 같네요.
친절, 베풂, 착한 마음, 좋은 뜻. 이렇게 행해지는 선행이 진정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을 베풀 때 가능한 그 대상에게 사랑받으려 노력합니다. 연인, 반려동물, 아끼는 물건, 친구. 사람이건 동물이건 심지어는 사물까지도 내가 준 사랑의 대가로 대상으로 하여금 나의 우선순위가 높아지길 바라죠.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그 역시 대가의 체계는 명확하다는 걸 알 겁니다. 후원금이 잘 사용됐는지를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대가 체계가 가장 명확하겠죠. 내 활동의 결과를 눈 앞에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비한 감정의 대가를 바랍니다. 대상이 나를 좋게 봐주길 바라거나, 내 선행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안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용된 감정의 대가가 불균형하면 우린 상처받고 슬퍼합니다. 혹시 "나는 아냐, 난 정말 그냥 그걸로 만족해"라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정말 그러시다면 존경합니다. 당신은 성인입니다. 저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본 경험이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성격 좋은 사람도 낭비된 감정에는 힘들어하고 지쳐합니다. 한탄하고 자책하며, 심지어 분노나 미움으로 전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것들 중, 상처받는 이유는 상대방과 나의 생각 차이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의 차이(갭, gap)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죠. 여기서는 이 차이가 동등하다면 소비, 불균형하다면 낭비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제품을 구매했을 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다른 장점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소비(올바른 소비).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면 낭비라고 합니다. 감정을 사용하는 것도 이 논리에 사상하면 되겠습니다.
어떤 대상에게 감정(마음)을 베푸는 것, 이 행위는 행위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간혹 이런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나는 내 모든 걸 털어 그 여자에게 해줬어, 모두가 잘못됐다고 말하지만 그 여자를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사실 만으로 만족해" 이때 자신의 감정을 소비한 대상은 그 여자가 아닙니다. 그 여자를 사랑했던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거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출한 감정에 대해 자신 스스로에게 보상받기보단 상대방에게 보상받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까닭입니다.
"너는 왜 부모 마음을 몰라주니?" 흔한 테마죠. 매체에서 많이 나오는 주제라 아마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의 종착지는 자기 자신일 겁니다. 자식에게 감정을 사용하는 행위 자체로 자기만족하기 힘들 텐데, 심지어 그 종착지가 자기 내부에 있습니다. 아마 영원히 충족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자식을 키워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가, 그런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고도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내용을 포함할 겁니다.
즉, 소비된 감정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감정을 사용하는 행위 자체로 달성되는지, 감정이 실제로 닿는, 종착하는 사람으로부터 충족되길 바라는지를 말이죠. 그리고 충족될 가능성이 있는가도 판단해야 합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무능함을 걱정하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논어, 그 오해와 진실, 안성재, 740p)
집단에서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할 때 사용한 말인데, 그걸 꼭 그런 용도로만 사용하는 건 논어를 읽는 좋은 자세는 아니겠죠. 요즘 세상에 이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문구는 그러지 말자고 가져온 문구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표출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자랑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적당히 자기를 내세울 줄 알아야겠죠.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없이 낭비하면 자신만 지칠 뿐이에요. 소비된 감정을 가시화해야 합니다. 저는 입으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가시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픔 이유>
도를 깨우쳐 마음이 완성된 사람은 항상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기에 이해득실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언제나 공평하고 느긋하다. 그러나 마음이 완성되지 못한 사람은 해득실에 사로잡혀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고 아프다.
(초역 논어, 미사키 류이치로, 이소담 옮김, 124p)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감정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로 달성된다면 도를 깨우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깨우치셨나요? 저는 아직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종착점, 내 감정을 받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을 낭비하기 싫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아프기 전에 상대방과 대화로 감정을 올바르게 소비하겠습니다.(ㅋㅋ)
감정 소비를 가시화한다는 건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내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는 감정뿐 아니라 이성적 영역도 사용해야 합니다. 기계를 사용할 때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이성적으로 상대의 버튼을 눌러 내 감정을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거죠.
공자가 이르시기를: "(남이 나를) 속일까 생각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추측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삼가여 역시 먼저 (이러한 것을) 깨닫는 사람, 이는 현명하도다!"
(논어, 그 오해와 진실, 안성재, 681p)
이번엔 도움되는 구절을 가져왔습니다. 이성과 감성을 조율하여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 사전에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여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감정을 소비할 때도 이렇게 영민하게 대처한다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측컨데 공자는 타고난 센스가 탁월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가 감정을 사용하는 것이 완전히 자기만족적이거나 완벽히 완성되어 있다고 보이진 않는데, 타고난 능력 자체가 감정을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별하는 것 같습니다. 간혹 섭섭한 감정을 아주 돌려 표현하기도 하죠.(그래서 과거 해외 철학자 사이에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아니지만요)
소비, 낭비, 보상 체계. 복잡한 말들을 사용해 표현했지 자신 스스로가 자기만족적인지 그렇지 않았는지 잘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에 자기만족적이긴 쉽지 않다는 거죠. 이건 착하건 말건 상관이 없습니다. 인성이 좋건 나쁘건 상관없고요. 타고난 도량이 아무리 넓다고 하여 무한히 퍼낼 수 있을까요? 공자도, 맹자도, 장자도, 노자도 다 사람입니다. 그들도 다 스트레스받고 한탄했습니다.
감정 낭비가 위험한 이유는, 소비된 감정에 적절한 보상이 없는 경우 슬프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남을 탓하게 되는 거죠.
<책임>
마음이 완성된 사람은 어떤 일이든 자신이 책임을 지지만, 마음이 완성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이든 남 탓으로 돌린다.
(초역 논어, 미사키 류이치로, 이소담 옮김, 229p)
만약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충분히 가시화시켰다면, 그것 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입니다. 내 안의 의문이었던 것이 상대방으로 이동했지만 상대방이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것이므로, 그 상대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변화를 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은 경우의 남 탓은 상대방의 잘못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나 자신의 욕망이 남을 향한 분노를 형성한 이유입니다. 감정 낭비의 원인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가계부 작성하듯 감정도 효율적으로 지출해야 합니다. 감정이 지출되는 것은 개개인의 성향대로 사용되겠지만 의도치 않게 발산되는 감정이라도 그에 대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하는 거죠. 마음 가계부는 먼저 자신이 자기만족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추측성으로 작성되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완벽히 알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다음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향에 맞게 감정의 수입과 지출 방법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수입과 지출 방법을 설정한다는 게 꼭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가시화하려 노력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감정을 사용한 대상에서 꼭 수입을 거둬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취미를 위해 돈을 사용하지만 실제 돈을 버는 곳은 직장인 것처럼 말이죠. 자신이 남을 위해 희생하길 좋아하는 타입이라면 그리고 남에게 어려운 소리를 하기 힘든 타입이라면 그 소비된 감정을 메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일종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더 창의적이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브런치를 돌아다니다 보면 글을 쓰거나 책을 보는 것으로 감정을 충전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명상이나 사진과 같은 취미도 많이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좀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ㅎㅎ)
마음은 총량이 있습니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의 한계치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지출된 감정의 빈 부분은 꼭 다시 채워 넣어야 합니다. 마음의 크기는 사람의 됨됨이와 관련 없습니다.(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관련 있다고 생각하면 신경 쓰이니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단련하면 넓힐 수 있겠지만 그건 누구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가계부를 작성해야 합니다. 내 감정은 어디서 어떻게 지출되는지, 어떤 방법으로 다시 채울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구로부터, 어딘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받을 수 없는 게 세상이죠. 사랑을 주고받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발단은 내 안의 욕심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도 욕심입니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없는 만큼, 누구나 충분한 마음을 소지하지 못합니다. 마음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이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