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버릴 수 있는 힘
몇 번의 이사에도 버리지 않던 커다란 냄비, 그 큰걸 둘이 사용할 일도 없다며 수 없이 말해도 모셔두던 것을 이제야 버리려는 듯 현관 앞에 뒀다.
"엄마 이거 왜 여기 뒀어?"
"버려야지, 출근할 때 밖에 갖다 둬라"
시집올 때 샀다며 39년이나 짊어지고 다녔는데 무슨 일일까? 시집살이, 남편, 시아버지, 이런 일 저런 일 다 담겨 있다며 목숨같이 챙겨 다녔던 건데 말이다.
"무슨 일 이래? 이걸 다 버리겠다 그러고."
"옛날 생각이 하나도 안 나네, 어제 싱크대 정리하다 꺼내봤는데 이제 옛날 생각은 하나도 안나, 쓰지도 않는 거 괜히 가지고 다니느라 고생만 했네. 너 말대로 진즉 버릴걸 그랬다."
사람 좀 만나라고 애원하길 10년, 지난달 단지 내 등산모임에 몰래 등록한 것 때문에 언쟁도 있었지만 이리된 걸 보니 되려 늦게 한 게 후회될 정도다.
"엄마, 재미있어?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바람 쐬고 그러니까 좋지?"
"좋다. 정말 좋다. 그 나쁜 놈에 영감이 죽어서 까지도 날 괴롭혔지 뭐야."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라는 말도 있잖아."
"맞다. 내가 너무 끌어안고 있었네."
만나는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즐거우신 게 분명하다. 예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잊혔기보단 기금 생활이 더 즐거우신 거겠지.
"맘에 드는 어르신은 없어?"
"야, 너나 어디서 남자 좀 만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죽을 것 같이 앉아서 맨날 티브이만 보더니, 뭐야 엄마 그런 말장난은 어디서 배워왔어."
"장난이라니 진지해. 자꾸 말 붙이지 말고 빨리 출근해라."
등을 쓰다듬는 엄마의 눈이 글썽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번, 본인 때문에 내가 피해를 많이 봤다며 울면서 이야기하셨는데, 결혼 못한 건 내 탓이라 아무리 말해도 엄마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엄마, 엄마도 빨리 씻고 나가야지 오늘 모임 있잖아."
"그래, 잘 다녀오고. 오늘은 꼭 같이 저녁 먹자."
오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흔히 본다. 시집올 때 산 냄비를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친구 어머니의 이야기인데, 글에서는 버리게 된 것으로 작성했지만 그분은 아직 가지고 계신다. 정확히 어떤 심정이 버리지 못하게 하는지 모른다. 다만 냄비와 함께한 시절, 시집살이, 남편 살아있을 때의 과거들에 얽매여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이 글은 그분의 심리를 추측해 본 이야기다.
오랜 물건을 보고 있자면, 그 시절 이야기가 떠올라 그 안에 깊숙이 빠져들 때가 있다. 좋든 나쁘든 그건 한 시절의 자신이었기에 종적이 담긴 물건을 버리자면 마치 내가 버려지는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기간이 길면 길수록, 감정의 폭이 크면 클수록 물건에 대한 애착은 더 크다. 추억이기에 언제까지나 끌어안고 있어야 할까? 나는 그것을 버림으로써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로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지난날에 얽매인 감정이 아니라 지금의 감정으로 살아야 함을 말이다. 현재를 살아감을 알고서야 과거를 떼어냈든, 과거를 떼어내고야 현재의 나를 알아가든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내일의 즐거움도 기대할 수 있음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