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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1. 2018

[영화 에세이]#1. 시네도키, 뉴욕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이 집구석은 분명 내가 사는 집구석인데 두어 달쯤 전부터 이리저리 집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생물이 있었다. 분명 아침에도, 저녁에도 어디선가 웅크리고 있을 건데 매일 밤 소등 시에만 나타나 귓바퀴 근처를 활주 했다. 빛을 끄고 어둠을 켤 때만 주저 없이 나타났으니 두 달가량 동거를 하였으나 낯짝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여하튼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딘가가 간지러워, 긁다 보면 뻘겋게 붉어 올라서 어젯밤도 내 집구석을 떠나지 않았구나 하였다.


 어느 날 잠들려 할 새에 발톱이 생살을 파고들어 불을 다시 켰다. 늙은 발톱이 하얗게 바래지고 고꾸라져 맨살에 고개를 푹 처박고 있었는데 쉬이 다듬어지지 않아 끝이 뾰족한 손톱깎이를 찾아들었다. 틱 하고 집게질을 할 때마다 발톱은 팽그르르 나가떨어져 깔아놓은 종이가 무색하였다. 가장자리로 밀려나다 못해 도려내진 발톱들은 흰 종이에 마저 안착하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늘어진 발톱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다 보니 문득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모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때다 싶어 에프킬라를 찾았는데 평소 어지러이 살던 까닭에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몇 번의 손뼉을 쳐서야 모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모기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는데 모기소리 비슷한 소리는 계속해서 아른거려 매일 밤마다 몇 번을 더 손뼉치곤 했다.



 얼마 전 구상해본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죽음과 삶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는데 시놉시스를 간략히 읊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소설가는 아침 신문에서 자신의 부고를 발견한다. 그는 분명 살아있는데 세상은 그를 죽었다고 하며 장례를 치르고 추모를 한다. 분명 곡절이 있을 진대 여기저기 뒤적이고 다녀도 도무지 자신이 죽은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다 만난 이는 죽은 아내의 삶의 행적을 찾아다니는 이. 그의 아내는 소설가의 독자였고 그의 소설을 계기로 삶의 이유를 찾았다더라. 그는 아내를 잃은 후 아내를 이해하고 살아나갈 이유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더라. 소설가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죽음은 삶의 종결일 뿐이란 것을 깨닫는다.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움직이는 것.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은 애써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고 그것을 잡으러 용쓰며 움직이는 내 모습 또한 아름다워지는 것. 고로 죽음의 이유가 아닌 삶의 역동을 좇는 것이 우리네 업이라는 것이 시나리오의 주된 골지였다. 구상만 하다 머리가 지끈거려 마무리 짓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직 내가 삶의 역동을 찾지 못한 까닭일 테다.


 누가 쉬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말하겠느냐만, 나의 감상의 근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영화를 감상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도 없을뿐더러 온전히 그 업에 피를 내어줄 용기 또한 없다. 그리하여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부차로 하고 먹고사는 일을 따로 하게 되었으니 생(生)은 잘 잡히지 않을뿐더러 나를 움직이게끔 하지도 못할 노릇. 고로 나의 감상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하얗게 늙어가고 있었고 쉬이 다듬어지지 않는 감상의 결과는 영화를 업으로 삼는 이들을 질투하는 것이었다. 허나 질투는 한껏 솟구쳤음에도 나는 그다지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므로, 나의 힘이 되지 못한 질투는 방구석을 헤집는 모기처럼 맴돌기만 할 뿐. 나는 그 언저리에 박수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마주친 영화가 <태풍 클럽>(1985, 소마이 신지)과 <이키루>(1952, 구로사와 아키라)였다. 두 영화는 삶의 역동에 관한 담론을 건넨다. <태풍 클럽>이 젊어서 죽는 것에 관한 영화라면, <이키루>는 늙어서 태어나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위 두 가지 영화를 꺼내보아도 여전히 갈피는 잡히지 않았다. 청춘을 지나치는 운명에서 미카미는 청춘을 질투했으며 와타나베의 역동 역시 젊음을 질투하여 모방한 것이기에. 두 영화 모두 삶의 역동에 대해 논하지만 나는 죽음을 마주하지도 죽음을 다짐하지도 않았기에 다시 태어나지도 눈부시게 죽을 수도 없다. 게다가 장황하게 삶과 죽음에 대한 논제를 다루었음에도 질투를 버리진 못하였으니. 그러다 꺼내 든 영화가 <시네도키, 뉴욕>(2008, 찰리 카프먼)이다.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를 짙게 깔며 시작한다. 이미지들은 뉴스, 라디오, 잡지, 신문, 유통기한 등으로 집구석을 죽음으로 점철하다 어느새 면도를 하려던 케이든의 이마를 찢어버리고 만다. 이마가 찢어진 이유는 파이프가 터져버린 탓. 터져버린 파이프는 벽 뒤에도 있고 바닥 아래에도 있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일상의 균열을 고하며 시작한다. 균열은 케이든의 삶을 침식해가면서 신체증상으로 발현된다. 번져가는 삶의 균열에서 생(生)의 동력을 잃은 케이든은 자아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네도키, 뉴욕>에서 누군가의 삶은 기록으로 은유된다. 올리브의 삶은 일기장을 통해 드러나며 정신과 의사와 케이든의 관계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읽혀진다. 케이든에게 인생을 기록하는 법은 연극을 만드는 것. 케이든은 타인의 작품을 연극하는 행위를 중단한다. 대신 자신 주변 모든 사람을 배역으로 하여 날마다 쪽지를 건네는 것으로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재창조한다. 그렇기에 연극은 케이든의 기록법이며 스스로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 <시네도키, 뉴욕>

 이 연극은 철저히 현실을 모방한다. 현실에서는 건물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연극에서도 벽을 쌓아 올린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배제한 연극은 타당치 못하기에 케이든은 자신의 배역으로 두 번째 케이든, 새미를 고용한다. 이것이 케이든이 진실을 구축해가는 법. 허나 케이든의 고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가 구축한 연극은 자신을 몰락시키던 주변 상황을 모방한 것이며 케이든은 그것들을 제어하려 한다. 연극을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한 케이든에게 연극은 투사적 동일시로 작동할 뿐. 케이든은 연극을 통해 불안한 현실로부터 안전한 방공호를 구축한 것일 뿐이다.


 케이든이 겪는 균열은 아델의 고별로 촉발된 것이기에 케이든의 고찰은 아델에 귀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로 케이든은 연극을 구축하면서 아델의 세계를 훔쳐볼 수밖에 없을 터. 그는 연극을 구축하는 내내 아델의 전시회를 방문한다. 아델을 향한 탐망은 전시회의 주소를 건네받는 장면에서 뉴욕 거리를 불빛으로 헤집는 부유선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미지화된다.

영화 <시네도키, 뉴욕>| 부유선이 밤하늘을 헤집는 장면

 <시네도키, 뉴욕>에서 케이든의 고찰은 청소를 통해 드러난다. 아델이 떠난 후 케이든은 자신의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고찰하고, 아델의 전시회를 방문한 후엔 아델의 집을 청소함으로 아델의 세계를 탐구한다. 케이든이 아델의 집에 들어가는 방법은 세 번째 케이든, 앨런이다. 그는 앨런인 척하며 아델의 집 열쇠를 건네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남기면서도 앨런의 이름을 적는다. 새미가 스스로를 탐구하기 위한 가면이었다면 앨런은 아델을 탐구하기 위한 가면인 셈. 올리브가 죽고 나서 케이든은 다시 한번 전시회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케이든은 앨런을 그린 그림을 마주한다. 그리고 곧이어 케이든이 극장을 청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탐구의 공간은 아델의 집에서 극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케이든은 방공호 안에서 아델을 탐구하려 하는 것이다.


 케이든은 밀리센트를 고용해 앨런의 역을 맡기면서 아델의 공간을 탐구하려 한다. 이러한 탐구의 실패는 응당한 것일 테다. 현실에서 아델의 집을 드나든 것은 케이든이기에 케이든의 명패를 달지 않은 밀리센트는 아델의 공간으로 접근할 수 없을 터. 결국 케이든은 직접 제4의 벽을 뚫고 아델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렇게 들어선 아델의 방은 분명 연출된 공간인데 아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직 케이든에게만. 이는 아델을 향한 케이든의 함몰이자 연극으로 내딛는 현실의 침투이다. 즉, 더 이상 연극이 안전한 세계가 아님을 의미한다.


 자아 도피적 함몰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는 새미의 투신이다. 케이든은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새미에게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다. 투사적 동일시는 새미와 케이든을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게 한다. 허나 무대 위의 새미는 케이든을 연기하지만 무대 밖에서 새미는 그저 새미일 뿐. 극이 진행될수록 케이든은 새미에게 괴리를 느끼게 되고 결국 새미가 헤이즐을 사랑하자 케이든은 자신과 새미를 구분 짓는다.(*)


* Caden: I'm me. You don't need someone to remind you of me.


 케이든과 새미의 분리는 연극의 실패를 함유한다. 연극의 실패가 도출한 결말은 새미의 투신. 케이든은 자살에 실패한 반면 새미는 자살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단지 케이든의 투사체가 아니라는 것을, 연극은 현실과 완전히 대치될 수 없음을 고발한다. 박리되던 두 케이든은 이 사건으로 산산조각 나게 되며 현실과 연극은 비가역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새미의 투신으로 현실과 연극이 분리되자 케이든은 타인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입시킬 수 없음을 깨닫는다. 새미의 장례식에서 케이든은 이렇게 말한다. ‘I know how to do it now. There are nearly thirteen million people in the world. Try to imagine that many people! None of those people is an extra. They're all the leads of their own stories. They have to be given their due.’ 여기 ‘thirteen million people’에는 아델 역시 포함될 터. 자아를 고찰하려 연극을 구축했던 케이든은 타인을 분리해내면서 삶의 균열을 봉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시네도키, 뉴욕>| 새미의 자살 장면. 피는 없고 바닥이 움푹 파여있는 등 다분히 연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원래 스크립트에선 제4의 벽을 허무는 장면에 이런 대사가 존재한다. ‘Hazel: Caden, there's no one in there. You've got to let go of her. She's not here anymore. I'm here.' 타인의 이야기를 제하고 보니 옆에 있는 것은 헤이즐. 케이든은 진정 그가 욕망하고 있던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한다. ’Hazel, you've been part of me forever. Don't you know that? I breathe your name in every exhalation.‘ 그날 밤 둘은 불타는 집에서 각자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각자의 고통은 서로에게 함입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 곁에 머무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할 뿐. 헤이즐은 다시 한번 케이든에게 말한다. ’We are here. I'm here.‘


 허나 먼 길을 돌아 손에 잡힌 행복은 이토록 빨리 인멸하는 것이던가.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케이든이 마주한 것은 헤이즐의 사망. 케이든은 가장 행복한 날이었던 순간을 연극하는 것으로 헤이즐을 추도한다. 추도의 내용은 새미의 장례식에서 케이든과 헤이즐의 모습을 연출하는 케이든과 헤이즐을 연극하는 것, 즉 연극의 연극이다. 이 연극의 연극을 감독하는 이는 케이든이 아니다. 연극의 연극은 케이든이 통제권을 상실하는 세계이다.


 앞서 케이든이 연극에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고찰의 한계라고 했다. 즉 통제권의 상실은 진정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한다. 하지만 헤이즐과의 하루를 평생 재현하려면 연극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바, 이런 상황에서 케이든은 연극의 연극으로 진입하기 위해 앨런의 역을 맡기로 한다. 앨런은 케이든이 앨런인 척을 하는 것으로만 영화에 등장했다. 즉 앨런이란 케이든의 연극 속 인물인 것. 그렇기에 앨런을 연기하는 일은 케이든을 연극의 연극으로 안내한다.


 극장은 뉴욕 주를 제유한다. 뉴욕 주는 극장으로 함축되고 극장 안의 극장으로 함축된다.(*) 함축된 극장을 이리저리 떠돌다 케이든은 앨런의 꿈에서 엄마로 등장했던 여성을 만난다.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Everyone's dreams in all those apartments. All those secrets we'll never know. That's the truth of it -- all the thoughts nobody will ever know.’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죽는다.


* 이는 지도에 표지 된 warehouse2를 들추면 warehouse3이 나오고 그것마저 들추면 warehouse4가 나오는 것으로 상징된다. 또한 뒤에 후술 될 원본 스크립트의 중첩된 warehouse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시네도키, 뉴욕>

 사람들에겐 모두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이것은 타인의 이야기로 함입될 수 없다. 자신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타인을 모습으로 자신을 재단하거나,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거나, 타인의 조각을 자신의 것인 양 품으면서는 근간을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삶이란 나 홀로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과업이란 것인가. 이런 결말은 인간 존재의 고독을 논하는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의외의 희망을 담고 있다.


 원래 대본에서는 <시네도키, 뉴욕>의 마지막 장면이 케이든이 직접 카트를 타고 warehouse 안의 warehouse로, warehouse 안의 warehouse 안의 warehouse로 들어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끝에 이르러 케이든은 해변에 도달하게 되고 그곳에서 어느 발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낡은 몸을 이끌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서 케이든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여성. 다시 말해 내면의 내면으로 깊숙이 내려가서 마주친 결론이 이것이라는 것인데. 원래 대본을 접하고 나니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인 ‘little person'의 가사가 꼭 이 장면이다.(*)


* I'm just little person. One person in the sea. Of many little people. Who are not aware of me. (중략) Life is precious every minute. And more precious with you in it. So let's have some fun.'


 찰리 카프먼은 이미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2004)에서 되풀이되는 삶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시네도키, 뉴욕>도 7시 44분으로 끝맺고 7시 44분으로 시작한다. 헤이즐의 말마따나 끝은 시작 속에 녹아있는 것. 이런 회귀 속에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법은 찰나를 긍정하는 것이다. 카프먼은 그 찰나를 긍정하는 법을 제시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선 그 방법을 'Enjoy it.'이라 언급했다. <시네도키, 뉴욕>에서는 케이든에 처음 헤이즐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등장한다. ‘just for FUN.’ 이 장면에서 울리는 음악, ‘little person'의 가사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Let‘s have some FUN.' 카프먼이 제시하는 방법은 그저 즐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Life is precious every minute. And more precious WITH YOU in it‘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에 대한 고찰에 타인을 함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 허나 찰나의 순간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가끔은 영화의 엔딩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잠깐 기대어 쉴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법이 아닐까.




 영화들을 끝까지 보고 나서 나는 손뼉을 치고야 말았다. 영화가 아름다워서 그럴 수도, 어두운 집구석 어딘가 모기소리가  여전하기 때문일 수도.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요. 영화, 재밌습니다.


 분명 나는 영화를 감상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도 없다. 또 온전히 감상에 몸을 내던질 요량도 아닐지어다. 허나 눈부시지 못하다고 죽을 이유도 없고 죽은 듯 산다고 생동(生動)을 탐할 필요도 없다. 질투의 본질은 사랑이라. 나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니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닌 영화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기록하기를 영화를 감상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하리라. 내 감상의 근간은 영화를 사랑하는 일이고 글은 나의 기록이니, 타인의 업으로 나를 재단할 필요도 없고 타인의 조각을 내 것인 양 품을 이유도 없다. 어차피 글과 영화가 즐거워 시작한 것을. 물론 때때로 모기소리는 아른거리겠지요. 발톱도 시큰거릴 겁니다. 하지만 질투를 핑계로 나를 질타하지는 않을 것이오. 발톱은 매일 새로이 분홍빛으로 자라날 테고, 모기소리가 들려오면 나보다 조금 큰 사람의 어깨에 잠깐 기댈 테니까.


 다시 한번 고합니다. 감상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나를 기록하리라. 오늘 아침에도, 내일 아침에도 어딘가 간지러이 붉어 올라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붉게 피어오른 그곳에서 연연하게 체리 향기 흩날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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