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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1. 2018

[영화 에세이]#2. 이터널 선샤인

사랑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사랑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고하건대,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어렵게 사랑을 합니다. 소담(小膽)한 사람이라 쉬이 사랑을 건네지도 못하고 사랑을 할 때면 자존감은 바닥을 헤집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지나고 나서도 때때로 뒤돌아보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네들은 모두 그렇지 않나 하고.


 수험생 시절만큼 많은 문학을 접한 적이 있던가. 한창 문학을 탐독할 때도 그마한 양의 글을 읽지는 못하였으니. 다만 그때는 참맛을 느끼지 못하며 접하기 마련.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후 들춰봤을 때 개중 몇 작품은 새삼 사무치곤 한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글을 꼽자면, 연정을 다룬 시가 중 하나,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다.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대동강 물이야 언제 다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교과서에 나오는 7언 절구의 형식미와 서경(敍景)과 서정(敍情), 도치와 과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석별의 감정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 사무쳤으리라. 비록 송인이 아닐지라도 누구든지 마음에 품은 한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것은 사랑을 노래하는 문장일 것이다. 사랑은 참으로 우리와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누구든 사랑을 하고 사랑을 노래하니까. 아마도 태초의 인류가 처음으로 적은 글귀 역시 사랑이 아니었을지. 그렇기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우리네 마음을 움직인다.


 허나 사랑이 무어냐고 하면 쉬이 대답하기가 곤란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된지도 모를 노릇이거니와 사랑을 하고 있는 동안조차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같이 있는 순간이 소중한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함께 해온 시간들이 사랑일까. 혹은 둘 다는 아닐는지. 그 누구도 명확히 답을 내릴 순 없겠지만 나 역시도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사랑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영화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2004, 미셀 공드리)는 사랑이란 것이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먼저 제목을 살펴보자.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라는 제목은 알렉산더 포프의 ‘Eloisa to Abelard'의 구절에서 따온 문장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벨라르는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된 뛰어난 인물이다. 아벨라르는 39세의 나이에 17세의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의 사랑이 엘로이자의 임신으로 세간에 드러나게 되자, 이들은 서로 다른 수도원으로 들어가 생을 마친다. 이때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12편의 편지들이 오늘날 ' 아벨라르와 엘로이자의 편지'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후에 알렉산더 포프는 이 내용을 다룬 시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Eloisa to Abelard'이다.


*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Each pray' 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 d


 아벨라르와 엘로이자의 사랑은 메리와 박사의 사랑과 꼭 닮아있다. 게다가 영화의 제목까지 메리가 인용한 시구의 단어이니 메리라는 인물은 쉬이 간과할 수 없을 터. 더군다나 메리라는 인물은 클레멘타인과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이(唯二)하게 기억을 지운 인물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뿐 아니라 메리도 눈여겨보니 영화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조엘은 나오미가 있는 상황에서 클레멘타인을, 박사는 아내가 있는 상황에서 메리를 사랑하는 대구를 이룬다.(*) 이렇게 영화는 메리와 클레멘타인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따라서 메리와 박사는 플롯의 전개를 위한 조연이 아니라 조엘과 클레멘타인에 대응하는 인물로 영화를 구축하는 한 축을 담당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 영화에서 나오미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각본에서는 나오미가 등장하며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메리의 비중도 영화에서보다 크게 등장한다. 각본에는 메리가 박사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낙태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클레멘타인과 메리는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대응하는 방식에서 있어 차이를 보인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흘러가는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 반면, 메리는 행복한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굴레를 끊어버리기로 한다. 영화는 두 인물을 통해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추억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제시된 두 가짓수 중 어느 쪽으로 기울어있는가.


 감독(미셸 공드리)과 각본가(찰리 카프먼)의 철학 차이일지,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영화와 각본의 결말은 큰 이격을 보인다. 각본의 마지막 씬에서는 늙은 클레멘타인이 50년 동안 15번 기억을 지운 채로 다시 한번 기억을 지우려 라쿠나 사를 방문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을 지우는 기계도 새로운 모델로 갖춰져 있다. 늙은 클레멘타인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고 그 위로 조엘이 남긴 음성메시지가 들린다. ‘Hi. it's Joel. What's going on, Clem? Why don't you call me back? Please call me. We need to speak.' 그리곤 기술자가 ’ERASE'버튼을 누르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한편 각본은 메리에게도 가혹하다. 메리는 박사의 아이를 낙태시켰다. 메리는 박사에게 자신을 사랑하긴 했냐고 물으며 자신은 자신의 아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며 울부짖는다. 따지자면 각본은 양비론적인 시각인 셈이다.


 반면 영화에서의 결말은 사뭇 다르다. 조엘의 집으로 향하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메리가 보낸 테이프를 틀게 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농락한다고 여겨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 집으로 향하지만 자신의 집에비슷한 테이프를 발견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집으로 찾아가고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했던 생각들을 마주한다. 각본에서 굴레를 반복했던 것과는 다르게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더라도 다시 해보면 달라질 것이라 믿으면서. 영화는 클레멘타인의 선택을 지지하며,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 Clem: This is it, Joel. It's gonna be gone soon.
Joel: I know.
Clem: What do we do?
Joel: Enjoy it.


 하지만 영화는 순간에만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추억에 쌓여 존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꿈속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타우크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하며 아침을 맞는다. 조엘이 도망 다니는 다른 공간들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손을 이끌고 진입하는 곳이다. 반면 무너져 내리는 집으로 들어갈 때는 클레멘타인이 조엘을 이끈다. 몬타우크의 무너져 내리는 집은 다른 공간들과 다른 위상을 갖는다. 이곳은 사랑의 시발점이자 추억의 근원지이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마주한 인물들은 상상 속의 인물이기에 조엘을 도와줄 수 없지만 이곳에서 클레멘타인과 한 약속은 현실에서도 이루어진다. 서로의 마음이 중첩된 곳. 이곳은 조엘 혼자만의 상상이 아닌,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공유하는 공간이자 감정인 것이다.

서로 틀어지기 전, 같은 마음을 공유하던 곳. 그곳이 몬타우크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현재를 음미하기로 한 후 이곳으로 들어서게 된다. 즉, 추억의 가장 깊숙한 곳은 순간을 긍정함으로 들어설 수 있다. 매 순간 긍정해왔던 순간들이 쌓인 것이 추억이기에 순간과 추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조엘은 가장 깊숙한 추억에 이르고 나서야 도망쳐오기 바빴던 추억들을 음미하며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각본과는 다르게 양시론적인 관점을 견지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그럼에도 그들이 결국 행복했느냐 하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이 영화를 지배하는 ‘반복’이라는 테마에 대해 살펴보자. <이터널 선샤인>은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뒤섞어 사건의 반복을 암시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클레멘타인의 집 앞에서 패트릭이 조엘에게 ‘Can I help you something? What are you doing here?’라고 묻는 장면까지가 첫 부분. 조엘의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두 번째 부분. 첫 번째 부분의 날짜는 2004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이다. 반면 두 번째 부분은 기억을 지우는 장면으로 이어지기에 발렌타인데이 전날 저녁에 라쿠나 사에서 상담을 마친 조엘이 귀가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부분은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부분에는 조엘이 창밖으로 테이프를 내던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테이프는 메리가 기억을 지운 사람들의 집으로 테이프를 발송한 후에 등장해야 하므로 2월 13일에 등장할 수 없다.(*) 또한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조엘의 관자놀이에는 장비를 위치시키기 위해 찍은 점이 있는데, 테이프를 버리는 장면에는 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장면에선 비가 오지만 점이 찍혀있는 장면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집에 도착한 조엘이 잠을 청할 때 친구는 8시 반인데 벌써 자냐고 묻는다. 하지만 비가 오는 장면에서 조엘이 테이프를 꺼낼 때 테이프의 재생시간을 나타내는 6:52는 a.m.10:10이라는 시각으로 바뀐다. 즉 테이프를 버리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다른 시각의 장면을 인설트 한 것이다. 이 장면은 2004년 12월 14일 조엘이 기억을 지운 후의 장면일 수도, 그 이전의 장면일 수도 있다.(*) 이들의 사랑은 영화에서 다루는 시점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다시 이별을 맞이할 것이다.


* 물론 테이프를 꺼내는 장면과 동시에 배경음이 다른 음악으로 전환되기에 그냥 음악 테이프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후술 하는 내용과 더불어 고려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장치라 사료된다.
* 테이프의 등장 시기가 기억을 지운 후이기에 전자일 수도 있다. 한편 조엘이 꿈속에서 몬타우크의 집을 나서는 순간 클레멘트의 대사는 ‘what if you stay this time.'이다. 또한 ’I can't remember anything without you.‘라고 하던 조엘은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들어서고, 어린 조엘이 베개를 가지고 장난치는 장면은 클레멘타인과 베개 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유년시절에 클레멘타인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한편 조엘의 꿈속에서 빨간 머리를 하고 있는 클레멘타인과 꽁꽁 얼은 강에 누워있는 장면이 잠시 삽입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후자일 수도 있다. 의도를 고려해보자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리라 생각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좌측 장면에는 보이지 않던 점이 오른쪽 장면에서는 존재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6분 52초 재생되었던 테이프를 꺼내자 오전 10시 10분이라는 시각이 나타난다.

 다시 그들이 행복하겠냐는 논제로 돌아와, 결국 그들이 맞는 운명은 테이프를 버리며 울부짖는 행위의 복제일 뿐인가. 과연 영화의 결말은 각본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것인가. 그들이 행복할지는 확답할 수 없지만 조엘의 말마따나 이들은 다시 사랑하면서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 Joel: It would be different, if we could just give it another go around.


 이들 사랑의 결말은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눈여겨볼 점은 이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더 눈여겨볼 점은 반복되는 장면이 점차 짧아진다는 것이다. ‘반복’이라는 테마는 우로보로스를 떠올리게끔 한다. 우로보로스는 정적인 형상과 동적인 형상으로 분류된다.(*) 이 중 동적인 형상은 나선형의 힘을 의미하며 유동성, 변화성, 발전성을 나타낸다. 한편 이 형상은 결국엔 점에 수렴하므로 소멸, 無를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눈밭에서 노는 장면을 반복해서 비추돼, 점차 짧은 장면을 반복해간다. 이는 동적인 우로보로스를 의미한다. 그들은 사랑하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랑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숙해가리라. 각본이 정적인 반복을 나타냈다면 영화는 동적인 반복을 암시하며 그들에게 극복의 여지를 남긴다.


*정적인 형상은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 동적인 형상은 꼬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영화의 엔딩은 눈밭을 뛰노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모습을 반복해서, 점차 짧게 보여준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집구석에도 길거리에도, 어느 해변 가의 별장에도. 그뿐만 아니라 사랑은 마주 잡은 손바닥 사이에도 존재하고 울며 찢어버린 연서(戀書)에도 존재한다. 사랑은 지난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걷는 길목에 놓여있다. 이별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우리의 업은 평생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어느 길 어귀에서 사랑과 이별을 마주할 때 고개 푹 숙이고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번 고하지만,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어렵게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랑이 두렵진 않아요. 아프고 울고 불며 치댄다 해도 사랑이 내게 온다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 테지요. 언젠가 다시 사랑이 나를 찾아올 때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Ok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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