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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1. 2018

[영화 에세이]#3.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욕망이 팽배한 디스토피아에서

욕망이 팽배한 디스토피아에서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키가 자동차 지붕치보다도 작을 어릴 시절 내가 뱉었던 대답이었다. 그들 역시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가늠하지 못할 판국이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20년 후 미래를 질문하곤 했다. 대개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이나 과학자. 몇 가지 아는 직업도 없어 열 손가락 간신히 접을 정도의 가짓수 중에 제 딴에 근사한 직업을 읊은 것일 테다. 그 당시 나는 또래에 비해 머리가 굵었는지는 몰라도 사뭇 다른 대답을 하였다. 교과서는 모든 국민이 읽게 되는 책이고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면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 나의 어린 주장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런 말을 하고 짐짓 뿌듯했던 것 같기도. 어린 나이에 당돌하게도 말입니다.


 머리통이 조금 더 굵어져 교복을 갖춰 입고 중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문학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개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최인호였다. 최인호의 저서 중 ‘상도’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향하는 곳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돈, 권력, 명예. 작중의 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데 나는 명예를 좇는 추사 김정희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김정희가 그린 그림, 세한도(歲寒圖)는 논어 자한편에서 그 제목을 따왔는데,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라 했다. 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가슴속에 새긴 문장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니 나의 욕망은 활로를 달리하게 되었다. 울타리 밖으로 나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건만 생각보다 고된 일도 많고 감정을 쏟는 일도 많았기에. 겨우내 보일러를 틀고 누운 방바닥에는 스멀스멀 우울감이 묻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그즈음쯤 나는 돈도 권력도 명예도 욕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지껏 내가 탐한 것은 기댈 곳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그런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얻지는 아직까지도 궁금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앤디는 과거에 지나와 열렬히 사랑을 나눴던 곳, 리오로 상정된 이상향을 꿈꾼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한 세계에 놓여있다. 결핍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부른다. 욕망의 대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팔루스(phallus)에 환상을 가지며, 그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2007, 시드니 루멧)에서 인물들이 욕망하는 것은 자본이다. 인물들은 돈을 위해 움직이고 돈에 의해 살해당한다. 앤디와 행크가 돈을 얻기 위해 택한 방법은 보석상을 터는 일. 영화는 이 사건을 서두에 제시한 후 각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조명한다.


* 자크 라캉은 우리의 욕망이 상상계라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탈피해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한 상징계로 쫓겨난다고 말한다. 욕망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을 소유함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즉, 팔루스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에 우리는 온갖 환상을 그려 넣으면서 살아가는 것. 하지만 이 향유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데 충족됨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구축한 세계에서 젊은 세대는 비틀거린다. 각자가 올라탄 외줄 위에서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돈을 욕망한다. 앤디는 리오에 살기 위해서, 행크는 위자료를 위해서. 허나 돈이란 것은 매개체로 작동하기에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터. 인물들을 추동하는 동력은 돈을 넘어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한 발짝만 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하니 앤디가 리오에 살려하는 이유는 지나를 붙잡기 위해서이다. 한편 행크가 돈을 욕망하는 것도 딸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을 추동하는 동력은 사랑의 결핍이다. 허나 이 세대에게 사랑과 돈은 쉽게 건네 지지 않는다. 비록 그들은 모두가 행복하리라는 환상을 품지만 서도.


 그들과 그들 주변은 철저히 파편화되어있다. 앤디는 지나를 곁에 붙잡아두고 싶지만 지나는 자꾸만 떠나가려 한다. 심지어 지나는 행크와 불륜 관계이다. 앤디는 자신이 가족에 속하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한편 행크는 이혼을 한 뒤 위자료에 시달린다. 돈을 쥐여주지 못하는 아버지는 제 딸의 신뢰를 잃는다. 그는 가정을 꾸려나가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하다. 이들은 중산층의 현실을 내포한다. 이들은 유한계급이 아니기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하는데, 단순히 노동하는 것으로는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돈을 훔치는 것뿐.(*)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타인의 희생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자명하다. 고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그들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 갱스터 무비는 아메리칸드림으로부터 탄생했다. 아메리칸드림은 공황으로 누구나 성공에 이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메리칸드림에서 성공은 물질적인 부를 의미한다. 허나 위계 된 사회에서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훔치는 방법밖에 없다. 이 점에서 갱스터 무비는 아메리칸드림의 모순을 폭로한다. 한편 이러한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 하에서 그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필히 실패로 귀결된다. 그들의 정당치 못한 탐욕은 총구를 저들의 어머니를 겨누게 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이는 자본의 결핍이 만드는 모순과 더불어 가족주의의 허상을 폭로한다. 과거 미국 영화가 미화해온 가족주의는 자본의 결핍 앞에 해체된다. 비록 그들은 사랑을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수평으로, 아래로만 향할 뿐 위로 향하지 않는다. 앤디와 행크는 바쁘다는 이유로 안부전화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니까.(*) 이러한 세대 간의 단절은 나네뜨 핸슨의 죽음이라는 참사를 불러일으킨다.


* 그들은 아버지의 생일날에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앤디와 행크는 그날 나네뜨 핸슨이 보석상으로 출근한다는 것을 모르고 범죄를 감행하게 된다. 즉, 나네뜨 핸슨의 피살은 세대 간의 단절로 야기된 것.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여동생과 부모님의 전화로 드러나게 된다. 간과된 여동생에 대해서는 후술 하겠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은 앤디의 대사로 인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앤디는 아버지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 발버둥 쳐왔다. 그런 아버지가 실은 앤디를 사랑했음을 고할 때, 앤디는 자신의 행위의 모순을 마주하며 무너지고 만다.(*) 이는 파편화된 현세대의 모습을 이전 세대의 탓으로 전가할 수 없기 때문. 다시 말해서, 파편화는 현세대가 내재한 문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절은 세대 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앤디와 지나 사이의 골은 단연 자본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연 앤디가 부를 거머쥐었다면 지나는 돌아왔을까. 지나가 바라는 리오는 물리적 공간의 리오가 아니라 관념의 리오이다. 지나가 앤디에게 바란 것은 소통, 마치 행크가 지나에게서 매력을 찾듯이 그가 그녀를 이해해주길 바랐다. 지나가 그토록 바라던 리오는 뉴욕 어느 집 한켠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나가 떠나간 후 앤디는 차분하게 방을 어지러뜨린다. 그가 분노할 대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을 터이니.


* 아버지가 앤디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세대 간 단절의 책임을 앤디에게 전가한다. 따라서 앤디는 'It's not fair'라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앤디의 탓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범죄는 구조주의적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에 세대의 단절은 필히 쌍방 과실이며 이는 후에 찰스가 앤디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사건 자체로 돌아가서, 그들은 강도 짓을 감행함으로써 범죄자로 내몰렸다. 사건은 이미 서두에서 주어졌으니 영화는 사건의 은폐와 범행이 폭로되는 과정을 통해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범행이 발각될 위기에 놓이는 것은 카센터에서 분실물과 관련해 전화가 온 것으로 시작된다. 분실물은 아마도 바비 라소드가 차에 놓고 온 CD. 행크는 쉽게 CD를 되찾지 못한다. 첫 번째 방문에는 사장이 자리를 비워서, 두 번째는 운전면허증과 결제 시 사용한 신용카드로 신분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행크에 손에 CD는 쥐어지고 CD는 아무런 역할도 못한 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체호프의 총’에 위반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CD를 누락시키면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 체호프의 총: 연극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다. ‘1막에 권총을 소개했다면 3막에서는 쏴야 된다. 안 쏠 거면 없애버려라.’라는 말로 요약된다. 쓰지 않을 장치는 없애버려야 하고 등장한 요소는 그 효과가 이어져야 한다.


 범죄가 들키게 된 것은 앤디가 장물아비에게 남긴 명함 때문이다. 범죄의 폭로는 행크의 실수가 아닌 앤디의 실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행크가 아닌 앤디에게 과실을 돌린다. 그 결과 앤디는 찰스에게 살해당하는 반면 행크는 돈을 들고 도주하는 장면으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영화가 마냥 행크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마는 이처럼 행크에게는 일말의 여지를 남겨둔다. 영화가 그에게 약간의 온정을 베푸는 것은 그에게 남아있는 약간의 인간애 때문이다.


* 행크는 처음부터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살인을 직접 저지르지 않는다. 앤디가 살인을 저지르는 광경에서도 행크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I don't like this!'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앤디는 이 장면에서 부들부들 떨며 복잡한 감정을 보이지만 결국 총을 쏘고 만다.

 행크와 다르게 앤디는 손에 피를 묻히기로 한다. 마약상을 살해함으로 돈을 갈취하며, 마침 고객이 침대에 누워있자 그마저도 살해하고 만다. 휴머니즘의 상실은 죽음으로 그마한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앤디가 악마적 본성을 지녔기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곤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마약을 파는 오피스텔에서 그의 표정에 묻은 뒤엉킨 감정을 보았을 테니. 그의 살인은 과거의 선택들이 촉발시킨 결과이고, 과거의 선택들은 중산층의 몰락으로 유발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원흉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책임은 중산층의 몰락을 야기한 사회구조에게도 향한다.


 영화는 공권의 무력함도 지적한다. 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네뜨 핸슨 사건에 관심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거기에는 먹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찰스는 경찰차를 들이박기도 한다. 결국 앤디를 응징하는 것은 범죄 앞에 무력한 공권력이 아니라 찰스이다.  찰스는 나네뜨의 복수로 앤디를 죽이면서 사랑을 위한 살인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기성세대를 돈과 사랑을 위해 살인을 하는 세계로 함입시킨다. 이처럼 사랑과 소통이 부재한 세상에서 인물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사회는 돈과 사랑을 위해 살인을 하는 사회이며 다분히 가부장적 논리에 놓여있는 사회이다. 이 세계의 주동인물은 남성들이고 그들 간의 권력관계는 원근법, 사각(斜角)과 앙각(仰角)으로, 롱 쇼트에서 손윗사람을 좌측에 배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이러한 세계를 비판한다. 가부장적인 위계구조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낸 중산층의 몰락, 그러한 연유로 발생된 사랑의 부재와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재물욕. 담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에 나열한 비판과 더불어 이 디스토피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를 은연중에 숨겨놓았다.


* 이미지를 읽을 때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관객의 시선을 좌에서 우로 향한다. 이때 먼저 시선이 닿는 좌측에 권력 편위가 일어난다. 이를 비근하게 접하는 예는 뉴스에서 남성 아나운서가 좌측에 위치하는 것 등이 있다.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행크보다 앤디에게 권력이 실리는 장면의 한 예시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거나  능동적 객체로 존재한다. 여성이 쥔 총은 남성의 강도 살인에 대한 반향으로만 격발 된다. 두 번의 격발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만든다. 그 결과 남성들은 갱스터 신화의 궤적을 완수하지 못하고 비극을 맞게 된다. 고로 이 총성은 위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격발이다. 허나 그 총성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한 명의 여성을 더 누락시킨다. 그 여성은 바로 그들의 여동생. 여동생은 가족의 구성원임에도 살인에 관여하지도, 살인을 당하지도 않았다. 또한 사건을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의 시점에서도 포함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동생은 다른 가족 구성원과 견주어 보았을 때 상당히 이례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여동생이란 캐릭터는 꽤나 소모적으로 사용된다. 데뷔작에서 <12인의 노한 사람들>(1957)을 만든 감독이 이처럼 소모적인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스크린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사건과 밀접한 위치에 놓여있음에도 여동생은 관객과 같이 그저 사건을 관망한다.


* 행크와 찰스는 뒷모습을 조명하면서 영화에서의 퇴장을 알린다. 앤디는 심전도가 asystole을 나타내는 것으로 죽음을 알린다. 반면 여동생은 대화 장면에서 잠깐 한 마디 거드는 것 이후로 등장하지 못한다. 마치 애초에 그 세계에 부재했던 것처럼.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유의해야 할 점은 관객 역시 스크린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과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있다. 허나 관객이 완전히 소외되지 않는 것은 스크린을 들여다봄으로 극 중 사실과 동일시하기 때문. 영화가 구축한 디제시스는 현실의 모방이므로 우리는 작중에 일어나는 사건과 밀접함을 느낀다. 관객은 주동인물들의 시점에서 사건을 관음 한다. 관객이 관음을 멈추는 순간은 인물들이 죄다 파국을 맞이하며 결말을 맺는 지점이다. 인물들의 퇴장으로 관객은 궤적을 따라갈 대상을 잃는다. 우리는 관음을 중단당했을 때,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고 다시 객석에 앉게 된다. 그리고 텅 빈 스크린을 바라볼 때, 작중 인물들의 파국을 목도했지만 스크린을 경계로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카타르시스는 완성된다. 이때 우리는 사건의 근처에 있으면서도 불참을 통해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동생과 중첩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섣부른 욕망에 발 담그는 것이 이토록 위험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만 파국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때때로 소망합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랑을, 가진 것 없어도 제 아비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랑을. 행크는 이 세계에 흠뻑 발 담갔지만 살인만은 그토록 반대했고, 여동생은 이 세계에 발 들이지 않았지만 가족을 위하는 장면에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믿습니다. 비록 이 세계가 뒤틀린 욕망이 팽배하고, 사랑을 지켜내기는 힘든 세상이라 할지라도 사랑 그 자체에 희망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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