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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2. 2018

[영화 에세이]#4.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쉽게 고하기 어려운 사랑에 부쳐

쉽게 고하기 어려운 사랑에 부쳐   

  


 ‘형, 저 사실 남자도 좋아해요.’ 언젠가 친구가 이렇게 고한 적이 있다. 아마도 나에게 처음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유도 없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던 날, 미처 삼키지 못한 밑 잔에 묻어있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누구를 사랑해왔다, 그래서 정말 힘들다, 그런데 미처 내뱉지 못하는 말들이 더욱 힘들다고 했다. 분명 서로 약간의 마음을 확인했음에도 그는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 대상이 남자이니까.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릴 적 한때 퀴어가 역하다고 생각했다. 나뿐 아니라 주변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시간이 흘러 동성애를 사람 대 사람의 사랑으로 환원시킬 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을 납득했다. 물론 아직도 모든 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기에 그 사랑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겪어보지도 않고 쉽게 이해하는 척하는 것만큼 비열한 처세술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세상은 쉽게 퀴어를 이해하는 척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죄악시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쉽게 동성애를 이야기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며, 그렇기에 당당히 밝혀도 된다고 한다. 물론 자신들은 다수의 군중 속에 머무르기 때문에 쉬이 꺼낼 수 있는 말이다. 실로 주위를 살펴보면 동성을 사랑한다고 고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아무리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는 척하더라도 말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다룬 영화가 대거 등장한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루었다는 것만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시대에, 섬세하지 못한 홀로코스트 영화는 수도 없이 양산되었다. 근래에는 퀴어에 관한 시점으로 화두를 옮겨왔다. 퀴어라는 주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한 관객에게 낯선 개념으로 다가와 초기 몇 작품에서는 신선함을 불러일으켰다. 허나 그 이후 퀴어는 다분히 소재주의적으로 소모된다. 이런 영화들은 과한 감정을 담은 채로 관객의 멱살을 부여잡고는 퀴어는 힘들어, 너희들은 그것을 이해해야 해, 그래야지 깨우친 관객이니까,라고 외칠뿐이다. 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루카 구아다니노)은 퀴어라는 주제를 건네면서도 그 주제를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먼저, 이 영화는 감정선을 다루는데 꽤나 섬세하다. 영화는 살구를 통해 둘 사이의 사랑을 담는다. 초반에 언급되었듯 살구의 어원은 조숙한, 미리 익힌, 아직 이른 등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사랑은 둘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어려운 사랑을 과감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조숙하지만, 낯선 사랑을 확인하기까지의 부끄러움에 미숙하기도 하다. 올리버와 엘리오는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살구 주스를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엿볼 때마다 살구를 따곤 한다. 엘리오는 살구로 자위를 하고 올리버는 그 살구를 베어 먹기도 한다. 한편 그들은 슬며시 어깨를 주무르며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엘리오는 다시 연주해보라고 하는 올리버의 말에, 부끄러운 나머지 자꾸만 편곡해서 연주한다. 개중 압권은 수줍은 감정을 숨기려 수영장에 퐁당 빠져버리는 올리버의 모습.      


 이들은 쉽게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 누구나 그렇듯 사랑이란 어려운 것이니까. 그들이 서로에게 이끌리는 과정은 우리와도 너무나 닮아있어 당연스레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퀴어의 사랑’이 아닌 ‘첫사랑’으로 비추어진다. 그들의 부모가 동성애에 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엘리오의 행동들에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여름동안 겪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과 갈등이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즉 영화를 퀴어적 서사로 이끌어나가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 광장에서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사랑을 고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이 대사 이후 그들은 둘만의 푸르른 공간으로 진입해 사랑을 나눈다.

Oliver: Is there anything you don't know
Elio: I know noting, Oliver.
Oliver: You know more anybody else around you
Elio: If you only knew how little I know about the thing that really matter.
Oliver: What things that matter?
Elio: You know what things.
Oliver: Why are you telling me this?
Elio: I thought you should know
Oliver: Because you thought I should know?
Elio: Because I what you to know. Because I what you to know...... Because I what you to know. Because I what you to know.......
Elio: Because there is no one else I can say this to but you.
Oliver: Are you saying what I think you're saying?
Elio: Yes.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토록 수줍음을 잘 표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

 그렇기에 올리버와 엘리오가 별장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들 중 하나를 여성으로 대치해도 감정선에 부조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 둘이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한다. 영화는 엘리오가 차에서 내리는 올리버에게 내뱉는 대사로 시작한다. ‘침입자다!’ 아마도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처음부터 반했을 것이다. 그의 방을 내주었으니. 이후 그들은 다른 이들을 점차 배제해가며 그들만의 푸르른 공간을 구축한다. 처음에는 온갖 다른 이유를 대며 둘만의 공간을 점유하던 그들은 나중에 이르러서 서로를 이유로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영화가 디제시스적 시공간을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는 것도 그들의 피신처를 건설하기 위한 묘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타인을 격리시키고 은닉해둔 공간 안에서 그들은 살포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 아마도 이탈리아 북부 어느 자그마한 마을일 것이다. 주변 마을로 몬토디네, 크레마를 제시하고 있으니. 한편 포스터들과 패션 스타일 등으로 미루어 보아 80년대 즈음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제공해주는 단서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숨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서로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 개인의 존재는 타자의 호명과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구축된다. 예컨대 집에서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말에 응답하고 아들로의 역할 수행을, 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부름에 반응하여 학생으로의 역할 수행을 하는 것이다.


허나 동성애적 연인으로의 호명에 그들은 응답할 수 없다. 아직 그들이 머무르는 사회는 동성애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이기에. 그러므로 올리버와 엘리오를 퀴어적 자아로 상정하였을 때, '동성애자'라는 호명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만 작동하게 된다. 즉, 서로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것이며, 동성애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퀴어적 존재로의 보편적 호명을 개별적 호명으로 치환하는 행위이며, 이 둘의 세계가 서로 이어져있기에 가능한 호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올리버가 조각상의 팔로 엘리오와 악수하는 것은 마치 '너는 나의 소년 애인이고 나는 너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고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엘리오의 손으로 엘리오를 마주 보는 것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올리버는 엘리오와 조각상을 같은 이미지로 중첩시킨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렇다면 이러한 비밀스러운 공간을 상정한 것과 그들의 사랑을 보편화시켜 첫사랑으로 묘사한 것은 영화가 담론을 건네는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동일시-분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관객은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영화와 격리될 수밖에 없다. 관객은 필연적으로 스크린 안에서 부재한다. 게다가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공간마저 은닉해놓았으니 우리는 낯선 ‘퀴어’라는 개념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관객은 스크린 밖에서 소외되어 있기만 한 존재는 아닌데, 관객은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퀴어를 다루었지만 그들의 사랑을 세분화된 카테고리 하 ‘퀴어의 사랑’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일반적인 범주의 사랑으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확장은 동일시의 장을 제공하여 은닉된 공간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동일시의 실마리를 잡는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퀴어’의 독자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퀴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 관객들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그 공간 안으로 초대된 관객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들의 사랑을 관망하게 된다. 이러한 동일시가 어긋나는 지점은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을 맞이하는 부분.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그들과의 부조화를 맞닥뜨린다. 결말에서 올리버는 엘리오가 아닌 다른 이를 택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성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이가 떠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그러한 장면을 등장시킨다면 불완전한 서사일 뿐이다. 좋은 플롯은 액션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물의 행위를 추동해야 하기 때문에. 고로 그저 마음이 식거나 고향에 돌아가 보니 잊혔다거나 하는 결말은 바람직하지 못한 구성인 셈이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대치시켜보면 영화는 불완전한 서사를 지닌 졸작으로 전락하게 된다. 허나 올리버와 엘리오는 모두 남성이기에, 그들의 이별에는 주위의 시선과 사회적 한계라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성애라면 부재했을 개연성이 동성애에서 존재하게 함으로 그들과 관객을 분리해낸다. 이러한 분리를 통해 관객은 스크린 밖으로 튕겨져나와 객석에 앉아있음을 느끼면서 스크린 속의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여름으로 상정된 시간 내내 그들과 동일시를 이루다가 겨울에 이르러 동일시가 일그러지고 그제야 퀴어에 대한 담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퀴어에 대한 담론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차디찬 겨울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여름은 더욱 뜨겁게 다가온다.

 결국 그들은 현실에 부딪혔다. 올리버는 내년 봄에 다른 여성과 결혼한다더라. 여름의 시간에서 상사(相思)로 코피를 쏟으며, 자정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그들의 사 여름처럼 물러가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올 뿐이다. 배경에 비치는 가족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바쁘게 음식을 준비하는데, 전경에 주저앉은 엘리오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사그라드는 여름의 열기를 추억한다. 허나 엘리오에게 추억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그를 부르는 말에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보며 엘리오는 겨울로 되돌아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화면이 꺼져도 모닥불 소리는 타닥타닥 들려오지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한다. 혹은 섬세하거나. 영화는 필히 무언가를 말해야 하므로 이 영화는 섬세하기로 했다.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결말에 우리가 마주하는 그들의 벽이란. 이 영화 한 편으로 쉽게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쉽게 연민을 가져도 안될 지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기로 해요. 남몰래 수화기 너머로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는 이토록 시린 사랑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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