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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3. 2018

[영화 에세이]#5.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사랑을 놓아버릴 때, 나는

사랑을 놓아버릴 때, 나는



 꽤나 오래 사랑한 적이 있다. 비록 혼자 감춰둔 사랑이었지만. 그날따라 일기예보도 없었던 가랑비만큼이나 우연히 마주쳐, 나는 젖는 줄도 모르는 채 그 사람으로 적셔 갔다. 내 머릿속엔 자나 깨나 그 사람이 있어서 하루의 어느 계절을 들춰봐도 그 사람이 서있곤 했다. 마 가득 그 사람이 자리 잡아, 미처 눌러 담지 못한 이름 조각들이 문득 혼잣말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서툴렀던 나의 사랑이 혀끝에서만 맴도는 동안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만 갔다. 장마였다. 때 아닌 여름 추위와 굵어진 빗방울에 행여 감기가 걸릴까 나는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였다. 멀뚱히 선 채로 발만 동동 구르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은 장마처럼 사라져 버렸다. 문득 어느 날 눈을 뜨니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비가 그친 이유는 모르겠다만, 나는 여전히 흠뻑 젖어있었다. 그 후로 몇 년을 더 이리저리 헤매이며 목말라했다.     


 다시 계절이 돌아와 햇살이 따스해질 무렵, 문득 내 옷자락을 쥐어봤다. 어느 정도 말라있었으나 약간은 눅눅한, 겉보기에는 모르나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보면 젖음을 알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상태였다. 누군가 스치면 들킬법한, 약간 퀴퀴한 옷을 입은 채 나는 바싹 마른 척하였다. 내 옷에 그날의 가랑비가 아직도 묻어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씩 배어 나오는 비 냄새에 문득 놀라긴 하였지만 서도.      


 이 사랑을 끝마치게 된 계기는 별다를 것이 없다. 혼자 하는 사랑이 너무나 버거웠던 것. 오랫동안 짓눌려 아파하면서도 쉬이 놓이지 않던 마음은 어느 날 그 사람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담담해졌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에게서 탈피하게 되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2003, 이누도 잇신)는 세계를 탈피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여러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조제를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 곳곳에 인서트 된 사진 장면은 이 이야기가 회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츠네오의 회상은 이상한 할머니와 낡은 유모차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유모차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미라거나, 보물이거나 혹은 돈다발이나 마약일 수도. 집으로 향하는 길에 츠네오는 달려오는 유모차를 마주한다. 가드레일에 퍽하고 충돌한 유모차를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조제가 웅크리고 있었다. 조제는 칼을 쥐고 있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칼. 그렇게 조제는 자신의 세계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조제, 호랑 그리고 물고기>에서는 세 가지 동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바로 조개, 물고기, 호랑이. 제목을 살펴보니 비슷하게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이다. 즉, 초반부의 조제는 조개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조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갇혀있는 존재이다. 덕분에 헤엄쳐 나올 수도, 철창을 부수고 나올 수도 없다. 조제가 웅크리고 있는 유모차는 조개껍데기를 묘사한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조제를 조개로부터 꺼내는 것은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와 정사를 나눈 이후 살던 집을 벗어나게 된다. 조개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 이후로 조제는 유모차를 타지 않는다. 다만 츠네오에게 업혀있을 뿐. 조제는 물고기가 되기를 원한다. 물고기는 헤엄칠 수 있으니까. 허나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물고기가 갇혀있는 이유. 아직까지 조제는 츠네오에게 의존하여 살아간다.

 조제 역시 이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헤엄쳐 나오라고 외쳐봐도 수족관에서 물고기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렇기에 조제는 바다로 향하자고 한다. 어쩌면 조제는 이때부터 이별을 준비한지도 모르겠다.(*) 바다에서 조제는 조개껍데기들을 집어 든다. 자신처럼 뭍으로 기어 나온 조개들이 다시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면서.


* 츠네오를 꼭 끌어안고 영원히 자신을 떠나지 말라던 조제는 '물고기의 성'에서는 길을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는 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사랑을 하는 이들은 둘만의 세계에 존재한다. 마치 그들이 ‘물고기의 성’ 안에서 조개껍데기 안에 나란히 누워있듯. 그러므로 갇혀있는 것은 조제뿐 아니라 츠네오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츠네오는 자신이 조제를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는, 호랑이를 보러 갔을 때, 자신에게 고마워하라는 조제의 말에 츠네오가 ‘내가?’라며 반문하는 장면.(*) 그렇기에 츠네오는 점점 지쳐간다. 분명 조제를 사랑하나 점점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미소로 화장실에서 조제를 꼭 끌어안으면서. 결국 그는 도망치고 만다.(*)     


* 조제: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 봐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고마운 줄 알라고.
츠네오: 내가?
* 츠네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이 장면은 사실 마부키 사토시의 애드립이라고 한다. 진심으로 조제를 사랑한 츠네오를 연기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장면이 아닐까.

 몇 달을 더 같이 산 뒤에 그들은 이별한다. 아주 담담하게도. 이제 그들은 둘만의 세계 밖으로 내던져졌다. 외로움을 준비해온 조제는 누가 밀어주지 않아도, 누가 업어주지 않아도, 당당하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누빈다. 늘 그래 왔듯이 계란말이를 부치고, 다이빙을 해 내려오면서. 호랑이가 철창에 갇힌 이유는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철창 밖에 있다. 철창 밖에 있는 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뿐, 호랑이는 철창 밖에서도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계 밖으로 내던져져도 힘차게 살아갈 줄 아는 조제는 그렇게 호랑이가 된 것이다.(*)


* 조제와 츠네오가 가까워지자 할머니는 아래처럼 말한다. 어쩌면 할머니는 처음부터 조제가 호랑이였음을 알고 있었을 수도.

 할머니: 총각. 제발 부탁인데, 여긴 오지 마. 저 아이는 몸이 불편해서 당신 같은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조제와 츠네오가 두번째로 만나는 장면. 츠네오는 철창을 통해 조제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때부터 조제는 호랑이였을 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세계에 갇혀있는 것은 조제뿐만이 아니었다. 츠네오 역시 세계 밖으로 내던져졌다. 오히려 바깥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츠네오이다. 장애인과 사귄다는 시선에, 매번 힘겨이 조제를 업고 다니는 것에, 그로써 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에 지쳐 도망치듯 조제에게서 벗어난 그는 그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일 뿐. 세계 밖에서 그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츠네오가 할 수 있는 건 사무쳐 주저앉아 우는 것밖에.


 아직도 나는 가끔씩 그 시절을 상상하곤 한다. 그 시절 사랑을 놓아버렸을 때, 나는 물고기였을까, 호랑이였을까. 이젠 그 사람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에 호랑이인 것일까, 발만 동동 구르다 지쳐 도망쳐 나왔기에 물고기인 것일까. 이렇게 때때로 떠올려보지만, 아무렴 어떠랴. 모두 그때의 추억이고, 그저 감사한 마음일 뿐. 그 시 이름만으로도 그토록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음에.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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