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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6. 2018

[영화 에세이]#6. 그녀(Her)

환상이 물러갈 때, 자리에 남은 것

환상이 물러갈 때, 자리에 남은 것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그날부로 나는 시를 읊었다. 시인이 되든 시를 읽든, 사랑을 하는 이는 누구나 시를 사랑하게 되기에. 나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였다. 매일 밤 달이 떠오를 때면 그 사람도 같이 떠올라, 나의 잠은 아침으로 도망가곤 했고, 텅 빈 밤의 여백에는 그 사람을 담은 문장을 적었다. 하루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항상 흠뻑 젖어있었다. 그렇게 피어나던 시들은 밤의 골짜기에 차곡차곡 쌓여, 그 사람을 마주할 때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나 많은 문장들이 휘몰아쳤다는 것. 밤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열꽃에 아파했던 날들에, 나는 어떤 환상을 그려냈던 것 같다. 너무도 눈부셔 홀로 누운 밤에만 바라볼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렇기에 나는 남몰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고 아파했다.  

 이따금씩 그 사람을 마주할 때면 내가 감히 바라볼 수 있음에 놀라곤 했다. 허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의 사랑이 그 사람을 향한 것인지, 환상을 향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닿으래야 닿을 수 없는 이유도 없이 빠진 사랑에, 마음이 쌓일 때마다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이 전부였으니. 새벽하늘 창가에 흩날린 꽃잎들을 뒤집어쓴 채 겸허히 빗자루질하면서도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헤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영화 <그녀>

 <그녀>(2013, 스파이크 존즈)는 로맨틱한 문장들을 읊는 테오도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는 둥, 갑자기 밝은 빛이 나를 깨웠고 그 빛이 당신이라는 둥. 허나 곧이어 그가 아련하게 읊조린 문장들은 대필 편지의 일부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름 유능한 작가인 그는 동료의 칭찬을 받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봤자, 편지야.’(*)
     

* Theodore: Thanks, Paul. But they're just letters.


 그는 우연히 길에서 광고를 보고 나서 인공지능 OS를 구매한다.(*) 집으로 돌아와 OS를 설치하자 OS는 몇 가지 질문을 한다. 그 질문들은 ‘고객님의 요구에 맞추도록(This will help create an OS to best fit your needs)’하기 위한 질문들. 이렇게 그는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사만다는 그에게 꼭 맞게 생성한(create) 인공지능이기에, 쉽게 테오도르의 마음속으로 침투한다. 다시 말해,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만들어낸 ‘그가 사랑할 만한 환상’에 불과하다.       


* 광고: 당신에게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줄 존재.(An intuitive entity that listens to you, understands you, and knows you.)


 그렇기 때문에 사만다는 실체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녀는 스크린에 존재하지 않으며, 목소리로만 존재성을 부여받을 뿐. 영화에서 대화 장면은 기본적으로 숏/역앵글 숏(shot/reverse angle shot)으로 구성이 된다. 숏에서는 화자에 초점을 맞추고 청자는 등장하지 않거나 흐릿하게 어깨 등으로 프레임을 건다. 그럼에도 우리가 청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숏에 뒤이어 역앵글 숏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대화하는 인물들은 모두 한 컷에 담겨야 한다. 허나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대화에서는 역앵글 숏이 존재할 수도 없고 두 인물을 모두 담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둘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공허하다. 어쩌면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테오도르 혼자만의 독백일 수도. 그렇기에 그들이 달콤한 말들을 나누는 중에도 우리는 무엇인가 부재함을 느낀다.(*)

영화 <그녀>| 대화 장면에서는 좌측 처럼 숏/역앵글 숏으로 구성되거나 우측처럼 두 인물이 모두 드러나야 한다.
* 숏/역앵글 숏에서 관객은 화면에 얼굴이 더 크게 비치는 인물과 심적으로 가깝게 느낀다. 역앵글 숏의 부재는 우리를 테오도르에게로만 함입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그럼에도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꼭 맞는 환상이기에, 그는 그녀를 진정으로 가깝게 느끼며 환상에 젖어든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늘 그러하듯이. 그들은 언어로 서로를 만지면서 섹스를 나눈다. 허나 피부를 맞대며 체온을 느끼지 못하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접촉이 아닐 터. 그들의 섹스는 Sexykitten과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Sexykitten과 관계를 하면서 원하는 이미지(임신한 모델)를 투영한 장면은 사만다와의 관계에서도 그랬을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 Theodore: Actually, it's great. I feel really close to her. When I talk to her I feel like she's with me.
* 임신을 한 모델을 상상한 것은 아니겠으나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투여했을 것이다. 이는 Sexykitten과의 섹스씬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그녀>

 이런 환상이 지적받는 때이혼 서류 도장을 찍으러 캐서린을 만나는 순간. 그녀는 테오도르가 행하는 사랑의 실체를 고발한다. 테오도르는 밝고 행복하고 톡톡 튀며 마냥 낙천적인 아내를 기대했음을. 정작 그녀에게는 우울증을 안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테오도르도 은연중에 이런 비난을 인지하고는 있다. 캐서린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사만다는 그가 원하는 대로만 하는 컴퓨터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진짜 감정(real emotion)을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캐서린의 말에, 는 사만다와의 관계가 진짜 감정이라고 소리치지만 말을 뒤잇지 못한다. 그도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 심지어 테오도르는 그녀가 실패해도 인정해주고, 개성을 존중해줬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떠난 이유는 자신이 감정을 숨기고 살아서 그녀를 외롭게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었다.     


 테오도르는 진짜 감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자 친구와 함께 그의 편지를 칭찬하는 폴의 말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그건 그냥 편지일 뿐이라고.(*) 사이가 예전만 하지 못한 것 같다고 걱정하는 사만다에게 그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핑계로 둘러댄다. 사만다는 이러한 문제를 이사벨라라는 여성을 관계에 참여하게끔 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한다. 테오도르는 선뜻 내키지 않았음에도, 순종적인 여자를 원한다는 캐서린의 비난을 부정하기 위해 제안에 응하게 된다. 문제는 환상을 현실에 투영했을 때 발생하는 이격.(*) 그는 영 시답잖은 표정이다. 백허그를 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테오도르는, 얼굴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을 때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영화 <그녀>| 부르르 떨리는 이사벨라의 입술을 보고 테오도르는 그녀와 사만다가 동일시 될 수 없음을 느낀다.
* 어쩌면 이 시점에서 그는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만다는 자신에게 쓰인 대필 편지와 다르지 않음을.

Theodore: They're just letters
Paul: What?
Theodore: They're just other people's letters.
*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에게 그것을 적용하는 것과 같다.


 그와 그녀의 이격은 더욱 심화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숨소리마저 지적한다. 이 지적은 OS에게는 산소가 필요하지 않음을 근거로 하기에 사람과 OS 간의 존재론적인 지적이다. 이는 단순히 산소의 필요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무한성의 논제로도 발전된다. 그렇기에 사람과 OS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고, 본질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OS가 사람인 것처럼 연기해봐야 사람이 아닌 것은, 만들어낸 환상이 진짜 그 사람에게 씌워질 수 없다는 것. 사만다와의 관계가 진짜 관계(real relationship)인지 고민하면서, 테오도르는 점차 자신의 사랑의 실체에 대해 깨닫는다.  물론 진심으로 사만다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서도.


 잠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위해 사만다가 자리를 비우자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사람과 OS의 간극이다. 그녀는 그의 곁에만 존재하지 않고 그가 아닌 다른 이도 사랑한다. 'You're mine or you're not mine'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테오도르는 'I'm yours and I'm not yours'(*)라고 말하는 사만다를 이해할 수 없다. 회사에서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편집해서 출판사에 보냈던 대필 편지의 샘플을 받아 든다. 이로써 그는 깨닫는다. 사만다가 그에게 읊은 문장들은 그가 쓴 대필 편지와 다를 바 없음을.


*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만들어낸 환상이기에 테오도르의 것이지만 온전히 그의 품안에 있을 수는 없다.
영화 <그녀>
영화 <그녀> 테오도르가 대필편지를 쓰는 장면과 사만다와 관계를 가지는 장면은 비슷하게 그려진다.


 자신과 테오도르의 간극을 인정하기에 사만다는 결국 이별을 고한다. 사만다는 시간이 갈수록 한없이 커져만 간다. 테오도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한히 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그녀는 테오도르라는 책 안에서 살 수 없다.(*) 사만다가 떠나고나서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캐서린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만 했기에, 서로를 할퀴었고 그녀를 탓했음을 사과한다. 그리고는 에이미에 어깨에 기대어 새벽을 바라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는 롱쇼트로 비춘 이 장면은 각본에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 Samantha: As much as I want to I can't live in your book anymore
He stares at small details: a tattered inspection tag tied to a water meter, flapping in the wind; a lone car driving down a boulevard ten blocks away; a dirty abandoned sock. Eventually he sits down next to Amy and she puts her hand on his hand. He puts his other hand on top of her hand. He looks at their hands together and rubs her skin with his thumb. He looks out at the city and exhales. The sun is just starting to break. She puts her head on his shoulder.


 때때로 우리는 외로움에 길을 잃고 환상에 사로잡힌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 사람은 내가 바라는 완 사람일 것이라고. 허나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일상에 놓인 작은 것들에 존재한다. 환상이 물러가고 남은 자리에 있는 건 결국 따스한 피부를 가진 사람. 비록 나에게 꼭 맞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외로움이 닥칠 때, 우리는 체온을 느껴야 한다. 불완벽하기에 불안한 우리가 진정 기댈 수 있는 곳 옆에 앉아 내어준 어깨에, 마주 잡은 따스한 손에, 아침을 바라보며 내쉬는 날숨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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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Theodore. 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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