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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30. 2018

[영화 에세이]#7. 태풍 클럽

눈부시게 죽기, 혹은 살기 위하여

눈부시게 죽기, 혹은 살기 위하여


 오십이면 백의 절반이니 많기도 하다 싶었다가도 거진 절반쯤 지나쳐와 보니 턱없이 짧은가 싶기도 하다. 중학생 즈음 나는 오십에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늙고 병에 곪아 죽지 않고 멋들어게 죽고 싶은 생각에. 딱 오십은 아닐지어도 오십 대 어느 길목에선 그러리라 했다. 이왕이면 손목을 긋고 죽는 것으로. 서서히 종말을 느끼면서 말이다. 교통사고는 몰골이 너무 끔찍하고, 목을 매다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어쩌면 자살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것은 아름답기에.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채로 강물로 걸어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는 얼마나 멋들어지던가. 로망을 차치하고 라도 죽음을 쉽게 생각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머니와 크게 다툰 뒤 칼을 들고 죽겠노라 고한 적도 있으니깐 말이다.      


 허나 살면서 많지는 않지만 몇 차례 죽음을 목도하였고, 손가락으로 다 못 헤아릴 정도의 장례식에 다녀오게 되었더니. 어릴 적 철없이도 용감했던 나는 이제 한 없이도 죽음이 아쉽고, 무섭습니다.

        

 <태풍 클럽>(1984, 소마이 신지)은 청춘과 죽음에 관한 명제를 던진다. 청춘은 태풍과도 같이 몰려오지만 청춘의 광기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내뿜어진다. <태풍 클럽>에서는 한 청춘이 학교를 떠난다. 그 아이는 리에, 리에는 어른이 된 자를 상징한다. 리에가 떠나게 되는 계기는 늦잠을 자버린 탓에 미카미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 리에는 엄마를 찾으며 왜 안 깨워줬냐 원망하지만 그 어디에도 엄마는 없다. 리에는 스스로 머리를 땋고 아마도 어머니의 자리일 이불속에서 자위를 한다. 이는 리에의 성숙을 의미한다.     


 어른이 되기 위해 학교를 벗어난 청춘, 리에에게 태풍은 가혹하기만 하다. 그녀에게는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으며, 빗속에서 울며 경찰 모형과 노래를 부를 뿐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리에는 태풍을 뚫고 돌아갈 수도 없다. 반면, 학교 안에 있는 청춘들에게는 발가벗은 축제가 허락된다. 그들은 빗속에서 리에가 구슬피 불렀던 노래를 신나게 춤을 추며 부른다.(*)


* 〈만약 내일이〉(もしも明日が)


영화 <태풍 클럽>| 리에는 이 장면 이후로 성숙하게 된다.
영화 <태풍 클럽>| 이 장면은 청춘에게 기댈 만한 기성세대가 부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태풍은 그들에게 축제를 선사하지만 무던 창문을 흔들기도 한다. 청춘은 이토록 비틀거리는 시기이다. 태풍 아래에서 그들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기도, 강간을 시도하기도, (*) 동성애를 하기도 한다. 허나 혹시하고 학교 밖으로 몇 발짝 내디딘 그들에게 태풍은 더욱 세차게 비를 퍼붓는다. 물론 그들은 크게 아랑곳하지 않지만 결국 잠을 청하려면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할 노릇. 학교 안에서 그들은 태풍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의자와 책상으로 벽을 쌓아 올려야 한다. 축제를 누리기 위해 학교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것. 이것은 청춘의 명확한 한계이다.     

 

* 켄은 자신이 화상을 입힌 미치코를 강간하려 한다. 영화에서 ‘지속’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리에가 늙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있기 싫다며 떠났듯, 미카미가 선생님처럼 자라나기 싫어서 죽음을 탐망 했듯. 켄은 평생 지속될 흉터를 보고 죄책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을 수도. 혹은 ‘영원’이라는 것을 마주하기엔 너무 유약한 청춘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태풍 클럽>| 잠을 청하기 위해서는 책걸상을 쌓아 올릴 수 밖에 없다.

 낮은 학생들의 시간이고 밤은 청춘의 시간이다. 낮에는 교복을 입고 밤에는 교복을 던진다. 물론 학교 안에서. 어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그들만 덩그러니 남겨진 청춘의 시간에서, 벽을 쌓아 올린 채 학교에 있음을 누리는 것.(*) 이것들이 그들에게 허락된 청춘이다.           


* 한편 이는 기성세대의 무능함을 고발한다. 선생은 학생들이 수업을 보이콧할 지경까지 이르게 하며 학생들을 빗속에 내버려둔다. 리에가 경찰 모형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장면 역시 젊은 세대가 의지할 만한 기성세대의 부재를 뜻한다.


 구속된 청춘의 공간에서 미카미는 창밖으로 태풍 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태풍이 지나가면 같이 아스라질 자신의 모습이 있다. 그는 책걸상으로 탑을 쌓는다. 태풍 소리는 소거되고 책걸상을 쌓는 소리마저 고요해지며, 아침이 다가오자 그는 탑 꼭대기 의자에 앉는다. 그들이 쌓아 올린 책걸상은 아침이 되고 수업을 하게 되면 다시 제자리로 찾아가리라. 그렇게 청춘이란 태풍이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 밤이란 시간에 책걸상을 아무리 쌓아 올리고 그들이 학교 안에서 축제를 누려도, 결국 책걸상이란 반듯하게 놓일 것이고 미카미는 경멸하던 선생님처럼 될 것이다. 이는 얼마나 불쾌한 운명인가.(*)     


* 리에가 자위를 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녀의 이마에 그려진 십자가는 원죄를 뜻한다. 청춘들은 불쾌하고 무능한 어른으로 자랄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영화 <태풍 클럽>
영화 <태풍 클럽>

 그렇게 청춘은 한 철 몰려왔다가 물러난다. 청춘으로 죽지 못하기 때문에 늙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계보. 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일 진대 그들은 눈부신 삶을 가지지 못할 운명이기에, 눈부신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다.

 미카미는 쌓아 올린 청춘 꼭대기에서 학교 밖으로 몸을 내던짐으로 눈부신 죽음을 맞기로 한다.(*) 아침이 되면 다시 선생님 같은 어른으로 자라나야 하는 종의 계통에서 눈부시게 죽기 위하여, 개체는 종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일 테지만, 미카미는 죽음을 통해 종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밤이 아닌 아침에 학교를 오는 자들은 그 계통 위에 살아가리라.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와 청춘을 겪지 못한 아이는 청춘들이 쌓아 올린 의자 벽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처절한 청춘의 사투를 겪지 못한 이들만이 청춘을 아름답다고 하며 결국 좁디좁은 프레임으로 이들을 가두며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 허나 우스꽝스럽게 진흙밭에 처박혀있는 미카미의 모습은 그다지 눈부시지 못하다. 단지 죽는 것으로 삶을 눈부시게 만들 수는 없다.
영화 <태풍 클럽>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눈부시게 죽기 위해선 더더욱 살아야 한다고.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애써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고 그것을 잡으러 용쓰며 움직이는 내 모습 또한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비가 그러했고 나비를 잡으려는 아이의 모습이 그러하듯, 사랑이 그러했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따라서 우리는 힘껏 움직여 살아나가야 합니다. 늙어서도 움직이는 자는 아름답고, 젊어서도 멈춘 자는 추하다고 믿기에. 언젠간 멈춰야 할 종의 계통에서, 아직 비어있는 여백을 향해, 끝끝내 눈부시게 몸부림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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