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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Aug 02. 2019

날것과 담아두는 것에 대하여

날것과 담아두는 것에 대하여



#1.


 요즈음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먹거리는 단연 회다. 먹지는 못하고 남들이 먹어 올리는 것들을 구경만 하는 것이지만 서도, 비슷하게 생긴 것이 이렇게 다르고 저렇게 다르고 하는 설명을 귀동냥하는 것도 퍽 재미있는 일이다. 나는 많은 횟감 중 연어를 가장 선호한다. 붉은 살 생선도 아닌 것이 은은하게 불그스름하여 무언가 고급져 보이기도 하면서도, 자주 먹을 가격은 아니건만 회 중에선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인지라 한 번씩 마트에서 사 와 직접 썰어먹으면 그만한 야식 혹은 안주도 없다. 그러한 연유로 요 근래 나는 한 달에 한 번쯤은 생연어를 썰어먹곤 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회라는 것은 신선도가 생명이라는 것. 회는 쉽게 상해버리기 십상이기에 사온 날 혹은 다음 날쯤에는 죄다 먹어 치워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 밤 10시쯤 느지막한 시간대에 할인 스티커가 붙겠거니 하고 마트에 들르면 1인분 치는 모조리 팔려있고 오백 그램 가량 되는 뭉텅이만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애석하게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는 않지만 어찌하겠나. 이미 여기까지 행차한 터라 그냥 사는 수밖에. 그렇게 오백 그램의 연어를 들고 집으로 온 날이 있었다.


 절반은 술 한 잔에 한 점씩 먹어치웠으나 절반은 그저 덩그러니 남겨진 터라 다음날 다시 먹을까 고민하다가 연어장을 담그기로 했다. 간장을 달이고 졸이고 어찌어찌 흉내를 낸 후 연어를 폭 담그니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하다. 허나 하루쯤 지나니 색이 조금씩 물드는 것 같고, 나흘째 지나 꺼내 먹어보니 감칠맛이 혀끝에 돌던데, 아흐레가 지나자 시큼한 냄새도 나는 것이 영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아깝지만 탈 날 바엔 버리는 것이 현명하기에 애써 담아둔 것을 몽땅 버리게 되었다. 날것으로 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깊이 담아두는 것도 오래 할 일은 아닌가 봅니다.



#2.


 늦은 아침, 도닥도닥 익숙한 손님이 문 두들기는 소리에 창문을 벌컥 여니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이 왔다. 계절은 소리 없는 발자국으로 슬며시 허리춤으로 다가온다.


 혹자는 온도로, 혹자는 낙엽으로 계절을 가늠한다지만 나의 경우에 있어서 계절은 냄새로 구분된다. 봄이 새싹 냄새와 꽃내음을 쥐고 온다면 겨울은 쨍하게 청량한 냄새를 거느리며 온다. 여름이 올 때면 지난밤 빗방울이 남긴 발자국에서 빗 냄새가 피어오른다. 후각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계절마다 세워진 팻말은 그날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마치 나를 둘러싼 온 공기가 그날의 것으로 치장한 듯하다.


 최근 친한 벗 하나가 이별을 겪었다. 무려 4년을 만났단다. 너무도 지쳐 이별을 고했지만 다시 잡고 싶단다. 사실 내게 물어보기 전 이미 연락을 해봤지만 받지 않았단다. 그래도 다시 잡고 싶단다. 감정은 쉬이 쉬어버리는 것과 같아서 날 것으로 두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건마는 깊이 담아두는 것도 감당키 어려운 일. 지친 마음을 담아두는 일도, 고하는 일도, 다시 잡고픈 맘을 담아두는 일도, 그 사실을 고하는 일도. 모두 다 어려운 일일 터다.


 여름의 빗 냄새는 한동안 그에게 시린 추억을 선사하겠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허나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끊임없이 소환될 기억들. 많은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내 앞에 놓인 올여름의 상흔도 조 더 또렷해진다. 지난 시절 걸었던 다리 위에서 홀로 먹먹하다. 다시 것이 피어오른다.


 때때로 마음에 담은 문장이 가슴에 맴돌며 응어리지고 날 세워 속을 할퀴는 때가 있다. 날카로운 말들이라 뱉어내면 안 될 걸 알면서도 뱉을 수밖에 없는 것들. 나도 앓아 만든 응어리진 문장들을 담지 못해 뱉어낸 적이 있었다. 이내 후회할 걸 알면서도. 허나 매번 그리하였듯 힘껏 피어오른 날것의 기억도 빗방울에 묻어 잠시 고였다 흘러간다. 익숙한 풍경은 능숙함을 선사한다. 아직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약간은 버겁지마는, 앓는 일도 익숙한 일이 되어간다. 이렇게 빗내음이 피어오를 때마다 그리하였듯 연어 한점 소주 한잔에 날것을 취하도록 삼키며 그리움을 담아봅니다.


 벗, 날것은 견디기 힘들지만 담아두는 것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걸 알아. 후련히 쏟아냈다고 들었으니 이제 익숙해질 일만 남았겠지. 벗, 올여름은 시리겠지만 내년에는 조금 더 능숙하게 술 한잔에 흘려보내자. 나는 이제 여름의 빗 냄새 싫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부디.

태안 신두리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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