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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Sep 05. 2019

매달리는 사람들과 매달리지 못하는 자

매달리는 사람들과 매달리지 못하는 자



 이 집구석은 분명 내가 사는 집구석인데 몇 년쯤 전부터 이리저리 집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생물이 있다. 분명 아침에도 저녁에도 어디선가 웅크리고 있을 건데 매일 밤 소등 시에만 나타나 귓바퀴 근처를 활주했다. 빛을 끄고 어둠을 켤 때만 주저 없이 나타났으니 몇 년째 동거하였으나 낯짝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여하튼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딘가가 간지러워, 긁다 보니 뻘겋게 붉어 올라서 어젯밤도 집구석을 떠나지 않았구나 하였다.


 어느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무언가 책상에 살포시 앉기에, 이때다 싶어 에프킬라를 찾았는데 평소 어지러이 살던 까닭에 쉬이 찾는 것이 오히려 기이할 터. 그런 연유로 몇 번의 손뼉을 쳐서야 가까스로 모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모깃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는데 모깃소리 비슷한 소리는 날마다 아른거려 나는 매일 밤 몇 번을 더 손뼉 치다 잠들곤 했다.


 어머니의 첫 아이의 태몽은 잉어에 관한 꿈이었다. 비늘을 철갑처럼 두른 채 다른 작은 물고기들을 교도하며 크나큰 도랑을 휘젓고 다니는 꿈. 그런 연유에서였나. 어릴 적부터 나는 무언가 두르는 것을 좋아하곤 했다더라. 어머니 장 속에 고이 모셔놓은 비단을 동생과 나눠 두르고 어느 시대의 로마 황제를 짓시늉 하기도, 수건을 위아래로 둘러메고 그리스의 신들을 흉내 내기도 하였으니.


 허나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 했던가. 내가 태어난 곳은 커다란 강가도 아닌, 콜로세움이나 올림포스 신전도 아닌 어느 굴다리 너머 빌라였다. 향기보단 냄새가, 금분보다는 먼지가 가득한 곳. 겨우 목을 가누던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면 내가 베던 베개 밑 장판 바닥에 쩍-하고 엎드린 바퀴벌레만이 사스락히 줄행랑치던 곳. 그곳에서 나는 바퀴들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을 거닐며 자라났다.


 열 몇 번의 해가 더 지나 바퀴들과 결별하고 머리통도 굵어지고 나니 전해 들었던 태몽이 슬그머니 발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태어나기도 전부터 무언가 두른 채 살았는데 세월은 한 꺼풀씩 낡은 허물을 벗겨내어, 알몸이 부끄러운 나머지 변명만 둘러대고 살았으니. 재능도 목표도 없이 재수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열없어 뭐라도 두르긴 해야겠는데. 그리하여 힘껏 손을 뻗어 휘적휘적 휘젓다 보니 세 번의 손짓 끝에 흰 가운이 손끝에 걸리게 되었다.


 허나 운 좋게 흰 가운을 두른 것이 마냥 자랑스러워, 천사의 하얀 날개마냥 나풀거리면서 의사처럼 거닐던 나날에, 내가 철없게 걸친 얇은 가운은 어쩌면 무거워야 할 것이었나. 가운을 걸친 어깨는 열등 혹은 오만이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이 매달릴 곳이란 것을 온실히 느낀 건 응급의학과 실습을 돌 때였다. 위급한 환자와 다급한 보호자는 이미 수차례 보았건만 이번엔 무언가 사뭇 달랐다. 다량의 질 출혈을 주소로 로컬 산부인과 의원에서 응급실로 이송된 삼십 대 초반의 여성. 얼굴은 새하얗고 의식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으며 자궁은 부드러웠다. 자궁이완증(uterine atony)으로 인한 산후출혈 때문에 발생한 저혈량 쇼크(hypovolemic shock)였다.


 순식간에 여러 의료진이 달려들어 라인을 잡고 수액과 혈액을 달았다. 배웠던 교과서의 단어들이 다닥다닥 붙어 꽁무니에 꽁무니를 쫓아 매달리고 있었다. 그토록 혼잡한 틈바구니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흰 가운을 두르고 있던 탓이었는지 내게도 역할이 하나 주어졌다. 내가 맡은 역할은 자궁저부마사지(uterine massage)였다. 자궁저부마사지. 배꼽 언저리에 있는 자궁저부를 찾아 힘껏 누르고 문지르는 일, 교과서에 가장 먼저 쓰여 있는 치료법, 허나 납작하게 인쇄된 활자로만 머리에 이고 있던 것.


 어느 누군가가 수없이 고민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밤새 고뇌해서 세상에 내었을 치료법은 종이 위에서는 그저 일곱 글자로 내려앉았겠지만, 짓눌린 공기 속에선 어찌도 이리 쉽게 부유하는지.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었지만, 한껏 풀려버린 긴장도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한 나머지 다시 한번 전공의 선생님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려는 찰나에 보호자를 바라보던 환자가 짧은 문장을 뱉었다. 나 괜찮아. 여보, 나 해낼 거야.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은 채 누구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게도.


 그녀는 매달리고 있었다. 시험관 아기로 가까스로 얻은 새 생명을 날숨으로 끌어안은 채, 이 세상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는 의지로. 매달리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매달린 여기 모든 이들이 어딘가 매달려있었다. 그저 높거나 낮은 숫자들이 아닌 시뻘겋게 시퍼렇게 멍든 검사 값들을 부여잡고는, 그저 혈관수축제가 아닌 심장을 두들겨 달라는 기도를 매달면서. 세상 모두가 완연하게 매달리고 있는 풍경에서 너무도 무거운 어깨에 짓눌린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꺼먼 바람벽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을 뒤로한 채 돌아온 방 안엔 오늘 밤도 모깃소리가 가득하다. 아직도 내 방 안엔 활자들만 부유하며 떠다니는데,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꾸짖는 목소리에 낯 뜨거워 가슴 한편이 뻘겋게 붉어 오른다. 나의 어깨는 어떻게 해야 무거워질 수 있을까요. 활자만 이고 있는 머리가 부끄러워, 매달리는 이를 어깨에 메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부러워 납작하게 손뼉만 치고 있는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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