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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Mar 21. 2019

소소한 것들에 축복을

 소소한 것들에 축복을



#1.


 고3이라는 뜨거운 단어를 차갑게 식히는 것은 한겨울 흩날리는 눈발이 아니라 아쉬움이 까맣게 내려앉은 성적표 이리라. 칠여 년 전 나는 누구보다 뜨거웠던 머리를 차가운 길거리에 푹 박은 채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어느 곳에서 일 년을 더 지새워야 하나. 깊은 고심 끝에 충정로역 어느 대로변에 자리 잡은 재수학원을 택했다.


 난생처음 몸담은 서울에서도 그 언저리는 꽤나 고개 치켜들고 있는 길목이었다. 신문사 빌딩이니 머리가 반짝이는 오피스텔 건물이니 그 옆에 어깨를 제법 맞추고 있는 재수학원 건물이니. 허나 나는 그곳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지방에 본적을 둔 재수생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학사라는 고시원 비스무리한 곳에 살았는데 내가 살던 학사는 길 건너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4차선 도로 하나를 경계로 두었을 뿐인데 내가 잠을 청하던 그곳은 번쩍이는 반대쪽과는 사뭇 달랐다. 아침마다 학원으로 나설 때면 이곳에선 분주히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비릿한 생선내가 풍기었다. 어디 비린내만 풍기었겠나. 숯불에 그을린 닭고기 냄새도, 가까이 들여다봐야 풍기는 나물의 내음도 있었다. 이곳은 골목이 있고 시장이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네 주둥이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있었고 그것들을 빚어내는 땀이 있었다.


 한편 길 건너편이라고 온통 반짝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수학원 뒤편으로 흔히 우리끼리 낄낄대며 이야기하는 '삼수 공원'이 있었다. 연애하는 재수생들이 매 어스름마다 삼삼오오 모여들기 때문에 저곳에 드나들면 삼수를 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 '삼수 공원'. 허나 그곳에는 예비 삼수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풀숲 곳곳에서 노숙자들이 번뜩하고 기지개를 켰으니. 운동을 한답시고 공원을 잰걸음으로 뜀박질할 때면 발소리에 잠에서 깬 노숙자들이 소리치곤 했다. 번쩍이는 거인들 뒤쪽으로는 우리네의 사랑과 어떤 이들의 구질한 삶 또한 있었다.



#2.


 비록 고된 시절이었지만 나는 이따금씩 기억의 우물을 맨손으로 헤집고 괜스레 그 근처를 찾아가 거닌다. 내가 그곳을 헤매며 그리워하는 것은 화려하게 지상에 내려앉은 별들이 아니다. 오히려 손때 묻은 시장과 골목길들일 터다. 그곳에서의 소소한 일상에야 말로 그 시절 추억과 흥취가 힘껏 묻어있다.


 때때로 심장 한 구석을 푹 덜어낸 것처럼 마음이 허기질 때면 더욱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더욱 어릴 적 나의 추억은 어디에 깃들어 있는가 하니 그다지 선명하게 아롱이는 기억은 없다. 다만 해 질 무렵 가로등 불만 연연하게 비추는 놀이터에서 빛나는 모래가루가 손톱 사이에 껴있던 추억의 편린은 풍등처럼 부유한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있던 시절, 방과 후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가방을 친구 집에 던져놓고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 귀가하던 일만큼은 뭉근히 아른거린다. 분명 미끄럼틀을 타거나, 두꺼비집을 만들거나, 골목에서 축구공을 차던 시답잖은 것을 했을 텐데도. 나는 어릴 적의 토요일이 그렇게도 따스하게 떠오른다.


 되감을수록 낡아가는 태엽처럼 당시의 향취와 잔상은 옅게 흩어져가지만 아직도 뭉근히 피어오르는 것은 그것들에 그 당시 유년의 흥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전교에서 몇 등을 했거나, 무슨 경연에서 상을 탔거나, 혹은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더욱 빛나는 일들이 아닌 그 시절 골목과 놀이터에서 있었던 사소한 것들.


 유년의 흥興이 그러했듯, 스무 살의 흥이 그러했듯, 지금의 흥도 마찬가지일 테다. 청계천의 아름다움이 냇물을 둘러싼 높은 거인들이 아닌 풀숲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에 있듯이 행복은 빛나는 것에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사소한 길목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집고 몸을 구겨 넣은 마을버스에, 싼 맛에 즐겨먹는 시장 순대국밥에, 맥주 한 캔 들고 거니는 한강 산책로에 언젠가 꽃망울 터뜨릴 추억의 씨앗을 심는다. 나는 건네고 싶다.


우리를 둘러싼 소소한 것들에 축복을, 찬가를 그리고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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