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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Feb 15. 2019

우울의 파랑波浪

우울의 파랑波浪



#1.


 문득, 낯익었던 것들이 너무도 낯익을 때가 있다. 공기는 밀密해지고 농濃해져서 일호一毫 움직이기도 힘겨워진다. 낯익음은 낡음이 되어 딱딱한 피부로 생동生動을 구속한다. 거리의 표정은 길쭉하고, 분침이 학살하고 지나간 시침은 때가 지나도록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감각이 들이닥칠 때, 나는 언제나 반짝이는 것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었지만 서도.


 내게 낯익음이 들이닥치던 시절, 아마도 나는 빛이나 소금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세상을 뒤지다 보면 어딘가에는 찬란하게 있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서쪽 끝으로 가 배를 타고 짧은 바다를 건넜다. 지척을 헤매다 가까스로 서쪽 바에 도착했다. 그곳에 서서 바라본 하늘은 어느새 흐드러지게 멍지고 있었고, 슬며시 내려앉은 태양은 바다에 번져 아롱아롱 호를 그리며 발끝까지 닿았다. 길어지던 그림자는 이내 저녁을 도려내며 발끝부터 밤을 드리웠다.


 수평선을 기준으로 밤하늘과 바다는 경계를 이루었다. 빛의 부재不在는 심해의 단층을 덜어내 바다 위에 저며 둔 듯하였다. 매캐한 밤하늘을 치장한 심해의 묵직한 질감은 바다를 힘껏 짓눌렀고 바다는 한껏 파도치며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수평선은 아우성치는 두 세계의 경계를 베어내며 자리를 비집었다. 사그르륵, 사그르륵.


 파도가 몸을 굴려 내게 다가오는 동안 수평선에 베여 부서진 조각들잘려나간 언어들은 하얗게 바래다. 새하얗게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지레 겁먹고 납작하게 엎드린 내 등어리 위로 무거운 공기가 짓눌렀다. 날개뼈 언저리에 파도가 올라탄다. 흉추를 훑으며 사그르륵, 사그르륵.

      



#2.


 파도는 모래를 이고 발치로 달려온다. 어느 곳에는 퇴적을, 어느 곳에는 침식을 선사하면서. 방파제로 한껏 어깃장 놓아도 파도는 철석같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때로 마주치는 우울도 軌를 같이한다. 우울의 파랑波浪은 힘껏 밀려온다. 어느 곳에는 한숨을 쌓으면서, 어느 곳에는 마음을 깎으며. 푸른빛으로, 붉은빛으로, 검은빛으로 덮쳐오는 파도에 나는 때때로 잠겨 질식하곤 했다.


 허나 파도는 밀려오기만 하지 않는다. 밀려오는 듯하다가도 이내 가라앉는다. 그리고 다시금 물러난다. 파도는 넘실거리며 가만히 숨죽여 우리를 바라볼 뿐. 파도는 제자리에서 마음을 굴려가며 동그랗고 빛나는 모래를 만든다.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임을 어루만지며. 제 스스로 갉아낸 것을 잔뜩 빛나도록 머리에 이고서야 파도는 잔잔해진다.


 우울이 내게 돌진해올 때, 어떠한 구원도 힘껏 덮쳐오는 우울 물리쳐주지 않는다. 빛도 소금도, 행여 다른 무엇도. 우울을 맞이하는 법은 단지 앓으면서 잔잔해지는 것, 힘껏 슬픔을 어루만지는 것, 마음을 굴려가면서 결국엔 빛나는 것을 뱉어내는 것. 파도가 깎아낸 반짝이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 머무르며 울렁인다.  


 모래를 한 줌 쥐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떨어진다. 손가락 사이에는 가장 여린 모래가루만 남아 세차게 반짝인다. 다시금 바라본 하늘엔 하얀 달이 파도 조각처럼 다. 달은 바다에 빠져 흠뻑 젖은 채로 열기를 죄다 뿜은 채 다시 떠오른 태양. 달의 아름다움은 그처럼 잔잔한 빛에 있다. 심연에서부터 잔잔해지는 것, 아스라진 채 앓아 만빛나는 . 달에 묻은 모래는 별처럼 하늘을 수놓고, 바다와 하늘은 같은 무게로 서로 포개져 기대고 있었다. 기대어 있으면서 조금씩 삼투하여 서로에게 번진다. 


 오늘은 달이 밝다. 수평선은 눅눅히 아득하고, 우울은 밀려오듯 밀려오지 않았고, 나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다. 집으로 오는 길 가슴에 바닷소리를 안고서 나는, 사그르륵, 사그르륵. 사그르륵, 사그르륵. 때마침 낯설어진 발걸음이 경쾌하다. 총총.



사그르륵, 사그르륵. 사그르륵, 사그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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