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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09. 2019

무너지는 것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하여

무너지는 것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하여



#1.


 대전, 전주, 서울. 다시 대전, 그리고 다시 서울. 살면서 큰일을 도모할 때마다 나는 터를 옮겨 살았다. 그럼에도 나의 본적은 그다지 요동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1동 아니면 법2동이 전부였으니. 기억에 묻어둔 시절에는 법1동에서 한참 가면 있는 어느 굴다리 너머 빌라에 살았다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난했다. 겨우 목을 가누던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리면 내가 베던 베개 밑 장판 바닥에 엎드린 바퀴벌레가 사스락히 줄행랑쳤다 할 정도였으. 그 시절 나는 바퀴와 함께 자랐다.


 구전으로 들은 이야기를 건너와 나의 기억이 시작하는 곳, 법1동 주공아파트 1단지에서도 우리는 가난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시장 거리에서 꼭 맘에 드는 머리핀을 사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고작 주머니에 500원이 없어서. 그럼에도 나의 유년이 그렇게 차갑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악착같이 버텨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늘따라 퇴근이 늦는다 싶은 밤에는 밖에서 흘러내리는 설움을 달래고 오신 날이라 했다.


 우리는 조금씩 이사했다.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우리의 세계를 넓혀갔다. 주공 1단지 안에서 두 번을 이사하고 세 번째 집에 도달했을 때쯤엔 소파도 하나 장만했던 것 같다. 오래오래 머물러달라고 튼튼한 물소가죽으로 된 붉은빛 나는 것으로, 비록 지금 훌쩍 커버린 한 몸 뉘이기도 힘들만한 크기였어도 그게 그렇게 좋았다. 머리가 굵어지고 몸이 자라 시간이 얼만큼 지나고 나서 우리는 드디어 찻길 하나 건너 법2동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얼마 전 소식을 들었다. 주공 1단지를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릴 것이라더라. 아니, 허물고 있는 중이라 했나, 아니면 이미 무너뜨렸다고 했던가. 여하튼 그곳은 태초부터 무너질 운명이었을 테고 우리는 그곳이 무너지기 전에 탈출했. 글쎄, 실은 그곳이 무너지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그곳은 낡아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꽤나 튼튼했으므로. 다만 허(虛)한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의 유년을 온통 기억 저변에 묻어뒀다는 점. 나는 그곳에서 탈출한 뒤로 오랫동안 다시 그곳을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그곳이 잃은 것이란 내가 도망 나온 빈자리뿐이 나의 도피가 아파트를 무너뜨린 것일 수도 있나. 그렇다면 나는 무너지는 아파트에서 도망을 나온 것인가, 아파트를 무너뜨린 것인가. 한때 이러한 고민에 잠시 잠긴 적이 있었다.



#2.


 때때로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 위태로움을 마주다. 무어랄까, 비틀거리며 외줄을 타고 있는데 발로 줄을 튕기지 않으면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 무언가를 토로하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날들이 있다. 그 말을 뱉으면 우리를 무리란 것을 알면서도.


 불과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에도 그랬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언가 낯설지 않았고, 이내 <프란시스 하>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좋아한다는 동질감으로 퍽이나 친해졌던 친구였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 하나쯤  없어도 끝끝내 반짝일 것만 같은.


 어쩌면 진즉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쉽게 망가질 사이였음을. 날이 갈수록 그 친구에겐 그다지 내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으니까. 딱딱한 말투와 때아닌 어깃장에 나는 얼쯤대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라, 속마음을 들춰보진 못하였어도 내심 섭섭했다.


 서운함은 쌓여서 말이 되었다. 뱉지 말자, 뱉지 말자 하였음에도 뱉어내지 않으면 속에서 온 흉벽을 할퀼 말들이었기에 어쩌겠나, 기어코 내뱉을 수밖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오해나 잘못은 없다 했지만 서도 필멸(必滅)의 발로(發露)에  번복은 없을 터. 좋은 기억들을 주섬주섬 담아보아도, 작은 손바닥으로는 부서지는 하늘을 가릴 수 없었. 나름대로 배려와 배려를 거듭하였음에도 무던히 밀려오는 허무에 나는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의 다툼은 나의 탓도 너의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파트는 내가 적()을 옮기지 않았어도 무너질 운명이었을 테고 우리의 어긋남도 애초에 온전히 합이 맞지 않았을 까닭이라 믿는다. 주공 1단지는 재개발되어 새로이 태어날 것이라더라. 언젠가 아파트는 무너지고, 관계는 부서지는 것일까.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파괴하는 것으로 스스로 건설하면서.


 아쉬움이 흐르지만 각자 발길을 내딛는다. 너는 너의 방식대로 빛나게 살아. 나는 나대로 빛나 볼게. 상흔은 재생을 부른다. 끝내 더욱 단단해지며. 가끔씩 생각이 오른다. 무너지는 것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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