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연기 속에 있다고 느껴지면 하늘에 신호를 보내 보아요
매캐한 연기 속에 있다고 느껴지면 하늘에 신호를 보내 보아요
당신은 한없이 낮은 밑바닥에 부딪혀 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한 번쯤은 밑바닥에 철푸덕 엎어져본다.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에. 원하는 대학에 못 가거나, 중요한 경기에서 실수를 하거나, 혹은 사랑에 실패할 수도. 안타깝게도 나는 셋 다 해보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한번 내딛게 된 밑바닥은 마치 늪지대와 같아서 걸으면 걸을수록 깊이 빠져들게 된다. 걸음마다 정강이까지 구렁텅이로 빠지고 도저히 다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할 순간이 온다. 세상 모두가 평온해 보이는데 나만 재난상황인 순간. 나는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는 왜. 도대체 무엇을.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 단지 조금 더 좋아하는 일에 골몰했을 뿐. 단지 조금 더 손 내밀지 못했을 뿐. 지금의 나는 흙빛에서 기어 나왔지만 아직도 밑바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바닥에 낮게 엎드린 터라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러한 이들에게 따스하게 한마디 건네주고 싶다.
"<엑시트>를 보아라."
<엑시트>(2019, 이상근)는 재난영화이다. 재난 영화는 필히 '재난'이 초기 사건(initial event)이 되어야 한다. <엑시트>에서의 재난은 어느 화학자의 테러. 허나 과연 <엑시트>에 등장하는 재난이 과연 화학테러 하나뿐인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이 영화는 재난영화임에도 삶에 대한 메타포를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테러가 등장하기 전, 용남의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이미 재난이라고. 우리는 그 속에 있다고. <엑시트>는 '인생'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따라서 밀려오는 연기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으로 대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된 인생이 몰려올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용남은 이렇게 말했다. 꿈은 이미 지났다고. 그들은 높은 곳을 향해 매달리고 올라가지만 그 이유는 희망이나 탐욕이 아닌 고작 살아남기 위함이다. 밑바닥에 있으면 죽으니까. 높이 올라가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 더군다나 이 테러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당한 화학자가 벌인 테러이다. 다시 말해 밑바닥으로부터 몰려오는 독성물인 셈이다. 반면 용남과 의주는 탈출을 감행하면서 쓰레기 봉지와 테이프로 몸을 감는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물론 인생에는 여러 가치관이 있다.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도, 그저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이 행복할 수도. 허나 우리 사회에서 후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극 중의 대사를 빌리자면 그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결국 어디론가 올라가야 하는데, 용남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쓸모없는 클라이밍뿐이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여 매달렸을 뿐인데 사회는 매정하게도 용남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짓밟아 떨어뜨리고 만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질 수 없는 용남에게는 사랑도 구질구질한 옛사랑뿐. 찌질하게 의주가 일하는 곳으로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잡을 뿐 아니라 이미 과장을 달았다는 거짓말까지 한다. 하지만 딱히 사회에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조카마저 모른 척하는 용남에게 영화는 되려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용남이 잘못한 것이라곤 남들이 취업 준비를 할 때에 산악 동아리를 한 것뿐인데 그게 어디 그토록 잘못된 것이랴. 매번 떨어지기만 한 용남은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로프도 없이 건물 벽을 기어오른다. 그는 도약으로 사자상에 매달리며 기어코 옥상에 도달하고야 만다. 가장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자는 결코 쓸모없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이 무언가 해낼 수 있었다.
결국 영화는 용남과 의주를 타워크레인까지 올려 보낸다. 아마도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일 테다. 그들은 진즉 구조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없었으면 아무도 구조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허나 용남과 의주는 계속해서 올라간다. 제일 높은 곳까지. 그들이 그곳까지 올라가게 된 것은 그들이 양보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살아남고 싶고 누구보다 재난을 몸소 느껴온 밑바닥에 닿은 자들은 타인을 위해 동아줄을 내어준다. 가족들에게도, 학원의 아이들에게도 구조를 양보한 채 그들은 제일 높은 곳으로 달린다. 아마도 영화가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 것은 이토록 이들이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는지.
한편 그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들이 보여준 탈출 과정을 생각해보자. 용남이 벽을 탈 때는 의주가 클립을 던져주고 로프에 매달릴 때도 반대편에서 다른 이가 로프를 힘껏 잡아주며 건넌다. 난간을 사다리로 이용할 때는 아래에서 용남이 잡아주며 의주를 올려 보내고 먼저 올라간 의주는 용남이 올라오게끔 난간을 붙잡아준다. 둘이 아닌 하나였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탈출. 지붕 위를 달리는 장면에서 온실히 드러나듯 그들이 높이 올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서로의 손을 잡음에도 있다. 낮은 곳이 몰려오는 인생에 치여 쓰러지는 곳이라면 제일 높은 곳은 그들이 해내야 할 최선의 지향점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타인을 배려하고 서로의 손을 잡음으로써 인생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로프에서 추락하던 그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도달했는가, 넘어져서 잠깐 연기를 맡은 용남의 누나는 그토록 심한 증상을 보였건만 용남과 의주는 어떻게 연기 속에서 촛불을 켤 수 있었는가. 영화는 이와 같은 무개연성에 대해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하여야 마땅한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기어코 그들을 구출해낸다. 좋아하는 일을 좇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따스한 마음씨를 가지고 서로의 손을 잡은 이들은 결코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그렇게 그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조카는 누구보다 먼저 마중 나와 용남을 반기고, 용남은 이제야 떳떳하게 어머니를 업을 수 있다. 의주 역시 마찬가지. 이제 의주는 고까운 점장의 뺨따귀를 후려갈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고작 클립이 무겁다면서 다음에 다시 만날 핑계를 만든다. 이것들이 영화가 용남과 의주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힘껏 이 두 사람을 응원해준다.
인생이 고되고 힘들 때도 있지요.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매캐하여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당신은 결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좋아하는 일에만 열심히 매달린다면 결국 마지막엔 하얗게 흩날리는 안갯속에서도 용남과 은주처럼 불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 매캐한 연기 속에 있다고 느껴지면 하늘에 신호를 보내 보아요.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따.따.따.따-.따-.따-.따.따.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