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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절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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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Mar 22. 2020

분노와 용기

절실한가 #2

모두 다 절실하다고는 하는데

"절실하다"는 것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느낌이나 생각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절박하다"는 그보다 더 강한 느낌으로 생사의 느낌이 더해진다. 이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절실하다"의  또다른 설명인 "매우 시급하고도 긴요한 상태에 있다"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절실하다라는 것은 절박하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것은 절박함이다.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다. 하지만  다행히 일을 치르고 난 후, 화장실안에 휴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휴지를 향해 느끼는 갈망은 절실함이다. 꼭 필요하고 간절히 원하지만 휴지가 없어도 우리는 결국 잘 해낼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모두 절실하다. 살면서 한번도 절실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사람은 찾기 어렵다. 지금 이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고득점이 절실히 필요하고, 좋은 집과 호의호식을 위해 고소득을 얻는 것이 절실하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그녀에게서 오는 카톡 답장이 절실하고,  몇년만에 동창회에서 만나 동기의 외제차를 보게 되면 성공에 대한 절실함이 가슴에 사무친다.


하지만 대부분 절실함은 그 자체로만 그치게 된다. 절실함이 절박함으로 바뀌는 경우는 극단적인 상황이 닥치지 않는한 발생하지 않는다. 생존의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절실함은 대게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철봉에 매달린 사람과 절벽에 매달린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팔 힘이 강하겠는가? 청소를 위해 밀어도 밀리지 않는 무거운 피아노를 옮기는 것과 불의의 사고로 금쪽같은 딸아이가 깔려있는 피아노를 드는 일 둘 중 어느 것이 더 가능하리라 보는가?  이런 상황은 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생존의 상황은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 아무리 죽을 각오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도 실제 죽는 것이 공부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이상 각오는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가장 쉬운 절실함의 동력 - 분노

대부분 어느정도 성과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되는 정서는 분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닥쳐서야 급박해진다. 진급누락이 되고, 구조조정대상자가 되어 퇴직권고를 받아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절절한 고민이 시작된다. 절실함이 절박함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바로 분노다. 좌절 다음에 오는 분노는 피해의식의 발로지만, 충분한 에너지가 된다. 금이 간 자부심으로부터 분노가 생성된다. 분노하는 것은 인간의 생리다. 막을 수 없다. 다만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대부분 이 분노를 원동력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그제서야 TV도 보지 않고, 독서실에서 살게 된다. 술자리를 끊고, 헬쓰장에서 죽도록 뛰게 된다. 의자가 약해지는 순간, 분노라는 연료에 불을 붙이면 '의지'라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분노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의지 역시 커진다. 적개심, 복수심, 자부심 - 모두 이를 악물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분노는 오래 쓸 수 있는 연료는 아니다. 번개탄처럼 쉽게 불이 붙지만, 그 자체로는 오래 가기 어렵다. 오직 분노만으로 끝없는 의지를 만들려면, 엄청난 분노가 필요하다. 영화에서 많이 보게 되는 시나리오다. 악당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영화 주인공의 분노가 그렇다. 닥치는대로 악당들을 때려 죽여야 주인공의 분노가 풀린다. 관객의 분노 역시 주인공에게 그대로 투사된다. 영화 제목 그대로 정말 '분노는 나의 힘'이다.


다른 경우를 보자. 분노가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에너지로 바뀌는 경우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분류한 의식수준의 단계에서 분노는 150이라는 에너지 수치를 나타낸다. 이는 200미만의 부정적 에너지중에서는 상위에 속하는 의식수준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주창한 의식지도는 인간의 의식을 에너지수치로 표현하여 분류한 것이다. 이 수치값들은 로그(Log)값으로 실제 199와 200이라는 값의 차이는 10배의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된다. 분노의 바로 아래 단계는 욕망이다. 그 아래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인간의 반응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으로부터 갈망과 욕망은 태어난다. 분노는 결국 욕망을 먹고 증폭된다. 분노의 바로 위 단계가 자부심인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부심의 에너지 수준값은 175다. 자부심 역시 긍정적 에너지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자부심의 본질은 파괴적이며 상처받기 쉽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분노와 자부심에 사로잡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부정적 에너지들은 지속되기 어렵다. 이 에너지들이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긍정의 단계로 뛰어올라야 한다. 


절실함을 이루는 긍정 에너지의 시작 - 용기

긍정의 초입단계는 용기다. 분노가 용기가 되는 순간 에너지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갈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런 사례는 우리의 역사만 살펴봐도 무수히 많았다. 유신독재 시절 부조리에 항거했던 젊은이들이 그러했다. 폭거에 대한 분노가 시발점이 되었으나, 결국 모이고 모인 그 힘들은 용기가 되어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분노가 용기로 바뀌기 위해서는 분노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열정이 의지가 되려면 열정의 대상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문제를 따져봐야 하는 것과도 같다.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정리해고 통보를 받는다. 비탄과 상실감으로 이어지던 감정곡선은 이내 앞날에 대한 공포와 그런 상황을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놓인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분노를 에너지로 전환하여 탈출구를 찾아보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에 체념과 한탄으로 일관하게 된다. 


분노가 용기라는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하는 이유는 분노에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자기를 몰라준 회사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좋지 않은 시장상황에서도 부실한 정책으로 경제를 망친 현정부에 대한 분노인가? 그것도 아니면 능력개발은 뒷전으로 둔채 저녁에 술이나 먹고 퇴근해서 TV만 보던 바보같던 자신에 대한 분노인가? 종잡을수가 없을 것이다. 분노가 어느 하나의 요인에 대한 것이 아닌 상황 그 자체에 향해 있는 것이 대부분 현실이다. 그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분노는 분노로 그칠뿐이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청년들의 분노의 대상은 명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노는 용기의 단계로 나아갈수 있었다. 해고된 직장인의 분노는 맥락이 없다. 정부에 대한 분노가 크다면, 그것을 대정부 운동으로 이어갈 용기로 바꿀수 있겠는가? 한낱 푸념에 그치고 말 것이다. 회사에 대한 분노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송이나 노동쟁의라도 할 것인가? 부당한 해고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오늘도 자신과 동료들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노동조합원들은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것은 용기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그런 용기를 가질수 있겠는가? 또한 자신의 분노에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부당한 조치였는가? 아니면 진정 자신이 정리해고되서는 안되는 그런 인재였다고 자부할수 있는가?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사례를 들었지만, 다른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분노는 발생하고, 자부심은 상처를 입는다. 분노의 원인을 가장 먼저 자기 안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갈가리 부숴진 자부심의 실체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자부심이 진정으로 근거가 있는 것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근거없는 자존심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스스로에게서 부족함을 발견하고 남의 탓이 아닌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할 때 분노는 소멸된다. 하지만 그 분노의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용기의 수준으로 올라간 에너지는 더 큰 힘과 가능성을 가져다줄수 있다.


졸저 <개발자 오디세이아> 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개발자들의 애환과 희망을 담으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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