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움직임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키네시스(kinesis)'다. 이 움직임의 특징은 시작과 끝이 명확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작한 다음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움직임은 중단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움직임에서는 완성과 미완성 두가지 상태 이외에 다른 상태는 없다. 키네시스에서는 과정이 무의미하다. 움직이고 있는 그 상태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다. 이것은 순간 순간의 움직임을 말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움직임이 바로 에네르게이아다.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은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춤을 추고 있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삶은 둘 중 무엇인가? 삶 자체는 언제나 '에네르게이아'일수밖에 없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삶이란 1살부터 80살까지 정해진 시점과 종점을 달리는 '키네시스'가 아니다. 내일도 삶이 지속되리라는 100% 확증은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키네시스'와 같은 삶을 산다. 대학입학이라는 종점을 위해 달리고, 그 다음은 취업이라는 종점을 향해 다시 내달린다. 결혼만 하면 행복할꺼야, 이혼하면 진정한 내 삶을 살 수 있을거야,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지금의 행복은 유보된다.
목표에 이르지 못했지만 애썼던 시간들을 있다. 자기자신조차 그 시간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한다면 '키네시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키네시스'의 삶에는 하나의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종점'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달했다고 생각한 그 '종점'은 사실 또다른 '시점'일뿐이다. '종점'은 죽음말고는 없다. 우주의 시공부터 인간의 영역까지 '키네시스'는 결국 불완전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 '에네르게이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실천은 단순하다. 밥 먹을때는 밥에 집중하고, 일 할 땐 일하고, 놀 땐 신나게 놀면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처럼 살면 된다. 즐거우면 그냥 막춤을 추면 된다. 오늘 한번 막춤을 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