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본능은 모든 생명체의 기저에 깔려있는 근원적인 욕망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죽지 않으려는 헛된 불사의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살고자 하는 본능,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 - 욕망이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가 욕망을 살게 한다.
부처의 말대로 인간사의 모든 번뇌는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욕망에 초연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수양을 많이 쌓고 단단한 내공을 쌓아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독야청청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던 사람들조차 한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삽시간에 무너지기 일쑤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행위(doing)다.
벼랑 끝으로 밀어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면, 어떠한 행위도 발생하지 않는다.
범인에게 있어 욕망이 더 큰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하고 소멸할때 그것은 좌절과 무기력으로 바뀐다. 이 단계에서 행위의 에너지는 0으로 수렴한다. 결국 그 끝은 죽음이다. 존재의 소멸이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하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냥 있으면 된다. 존재는 가장 쉬운 것이다. 하지만 비단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책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참을수 없이 가볍다. 그래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실존은 어렵다.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남이 되기 위해 살고 있다.
99%의 사람들의 출발선은 욕망이고, 그 욕망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being another)',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욕망'인 셈이다. 따라서 지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욕망의 실체다. 결국 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성공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잠깐의 의지로 짧은 환희를 맛볼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을 평생 지속하기는 어렵다. 샤르트르가 말한대로 타인은 지옥일 뿐이다.
욕망이 아닌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는 행위만이 죽음의 순간까지도 지속 가능하다. 존재로부터 나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러운 것들이지만, 외부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외부세계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어려운 장치들이 가득하다. 자본주의가 그렇고, 입시제도가 그렇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본연의 존재는 설 곳을 잃고 있다. 외부세계에서는 가져야 하지만, 존재의 세계에서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가지려고 애쓰는 노력은 결국 허무에 그칠 뿐이다. 삶의 전면으로 나아가려면 나의 존재를 외부로 확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더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바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결국 행위와 존재는 동일해진다. 존재로부터 행위가 나오고, 행위는 존재를 증명한다. 이 관계에서 욕망은 설 곳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다. 잘 쓰는지 못 쓰는지는 존재의 차원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외부로 확장하는 것이고.
글을 쓰는 행위에 어떠한 욕망도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 욕망들은 부차적인 것들일뿐 본질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좋아서 쓰고, 그나마 내 존재가 원하는 것이 이것뿐이라서 그저 쓸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었으면 하는 약간의 관종적 허망은 가지고 있다.
그래도 인간(人間)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