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함에 대해 - 프롤로그
세상에는 두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남들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
그리고 남들이 하라는 것만 하고 살아온 사람
둘 모두 성공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다른 유형의 사람이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남들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도, 남들이 하라는 것만 하는 사람 그 어느 유형도 아니다.
이 역시 성공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의 유형이 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면 남들보다는 어느정도 뛰어날 수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만 하면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다.
지속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태도가 되며, 태도는 역량을 결정짓는다.
하지만 지속과 노력은 결코 성공을 보장 하지 않는다.
절실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절실함이 일상을 압도해야 한다. 식지 않아야 한다.
동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꿈만으로는 부족하다. 절실함이 인생을 타고 흘러야 한다.
고대 중국 춘추전국 시대,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의 이야기는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한편의 드라마다.
춘추전국시대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응징한다는 목표와 죽은 부왕 합려에 대한 복수라는 확실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누리는 편한 생활 속에 의지는 점점 약해졌고, 부차는 약해지는 의지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내관들에게 부왕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본인을 깨우게 했다고 한다. 오왕 부차는 복수에 성공해서 월왕 구천을 노예로 삼는 승리를 맛보지만,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던 절실함의 마지막이었다. 복수에 성공한 부차는 성공에 도취된 채 유흥과 향략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오왕 부차는 20년 뒤 와신상담한 월왕 구천에게 대패하여 최후를 맞게 된다.
절실하다는 것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그 짓이 미치도록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짓을 해야 미치도록 원하는 또다른 무엇인가를 얻을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짓은 수단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고, 두번째 짓은 수단일뿐 절실함은 또다른 목적 그 자체에만 있다.
대부분 사람들의 절실함은 후자를 향해 있다. 오왕 부차가 그랬고, 우리 역시 그렇다.
전자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후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전자는 열정이고, 후자는 의지다.
때론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기도 한다.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이 그렇다. 사무치도록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렇다. 하지만 의지는 억지로 지속시키지 않는 한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범인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전자와 후자가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사랑과 연애가 그렇다.
미치도록 보고 싶고, 안고 싶어서 사랑을 하고 구애를 한다.
대체로 대한민국의 40대 가장들은 모두 절박하다. 두 어깨에 가족의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절박함, 절실함은 대걔 경제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다.
절박함 자체는 스트레스와 암세포만 만들어낼 뿐 아무런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절박함이 좌절로 바뀌는 이유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마땅한게 없다는 것이다.
그 수단 역시 절실한 것으로 대체될 때, 목표와 수단 모두 절실함이라는 선상에 서게 된다.
그럼 어떻게 수단마저 절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과 같다.
과연 의지가 열정이 될 수 있을까?
그냥 큰 욕심을 내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일상에 만족하라는 경구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답을 얻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절실함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 안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