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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Oct 15. 2021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 곁에서 분신처럼 함께 살고 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랩톱은 이미 우리의 신체기관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우리는 더이상 타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저장용량이 커질수록 우리 뇌의 기억용량도 늘어난다. 펜글씨 예쁘게 쓰기와 같은 활동은 먹을 갈고 난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골동품 취미가 되었다. 


200년 전에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타자기를 사고 난 후 다소 다른 글들을 써 내기 시작했다. 원래 니체의 문장은 다소 긴 편이었는데, 문장의 길이가 전보다 짧아진 것이었다. 좋게 보자면 간결해졌다. 이 변화를 눈치챈 니체의 친구들은 니체가 펜이 아닌 타자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인의 달라진 문체에 대해 니체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새로운 글쓰기 도구가 내 사고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네."



지금 우리 주머니 안에는 고성능 프로세서가 달린 타자기, 복사기, 카메라, 캔버스, 수첩, 텔레비전 올인원(All in one) 만능기계가 들어있다. 아, 이 기계는 부르면 대답하고 스스로 말도 한다. 기술은 도구이면서 도구 이상의 것이다. 현대인들이 진보된 기술로부터 받는 영향은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커졌다. 소프트웨어는 엄청나게 복잡해졌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수십년 전에 비해 그리 똑똑해지지 않았다. 수십년 전의 개발자들보다 단지 더 복잡한 컴퓨터 게임만 잘 할 뿐이다. 멀티태스킹 능력은 높아졌지만, 집중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단지 기술과 도구만 고도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거인이 된 것 마냥 굴고 있지만 단지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난쟁이에 불과하다. '더 빠르고 더 많이'라는 모토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최초로 시계를 조립하고 인간이 시간관리를 시작한 이후  우리의 시간감각은 시간(hour)이 아닌 분초를 다투고 있다. 횡단보도의 빨간불 앞에서 기다리는 십여초의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속도는 황야의 목장에서 결투를 위해 권총을 꺼내는 카우보이보다 빠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우리의 모든 시간과 감각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배하고 있다. 니콜라스 카는 그의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기술과 미디어에 중독된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나의 뇌는 굶주려 있었다. 뇌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질수록 허기를 더 느끼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링크를 클릭하고 구글에서 무엇인가를 검색하고 싶어했다.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내게 살과 피와 같은 워드프로세서가 되었고 인터넷은 나를 초고속 데이터 처리기기 같은 물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 나는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이다.”


많은 실험결과 도구 의존도는 뇌의 능력을 감퇴시킨다. 2003년 네덜란드의 인지과학자들은 간단한 실험을 했다. 서로 다른 소프트웨어가 보조도구로 사용될 때 피실험자들이 얼마나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두 가지 소프트웨어가 제공되었다. 하나는 매우 간단한 소프트웨어로 극히 단순한 기능만 제공했다. 다른 하나는 더 많은 기능을 제공하는 훨씬 고도화된 소프트웨어였다. 코딩을 시키는데 한쪽에는 vi 만 주고 다른 한쪽에는 마이크로소프트 비쥬얼 스튜디오를 준 셈이었다. 실험결과 초반에는 많은 기능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그룹이 더 빨리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그룹의 성과가 더 올라간 것이다. 간단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실험그룹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집중력과 더 많은 경제적인 해결책, 그리고 더 나은 전략을 보여주었다. 반면 기능이 훨씬 많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실험그룹의 성과는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더이상의 발전이 없었던 것이다. 


실험주도자 반 님베겐은 현대인들이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지적인 활동을 컴퓨터에 맡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경향이 강해질수록 뇌의 능력은 점점 감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모든 도구나 소프트웨어에 일반론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니체의 타자기 사례에서 보았던 것처럼 도구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우리의 행동양식과 사고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도자기를 빚는 도공이 전통 불가마 대신에 전기불가마를 쓴다고 해서 도자기의 예술성이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도구의존도에 따라 도공의 예술적 행위 역시 바뀔 수 있다. 불가마 떼느라고 고생하던 그 시간에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남는 시간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스마트기기의 데이터 처리능력은 엄청난 향상을 이루었지만 우리 뇌의 데이터 처리능력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덴마크의 인터넷 전문가 제이콥 닐슨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웹에 올라오는 글들을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 조사하고 실험했다. 그 답은 명확했다. "읽지 않는다". 웹상의 글은 기본적으로 하이퍼텍스트다. 순차적 방식이 아니라 그물망처럼 구성된 데이터와 텍스트로 이루어진다. 한곳에만 머무르며 차분히 글을 읽는 경험을 하기 어려운 구조다.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것은 독자에게 많은 인지적 부하를 준다. 책의 10페이지를 읽다가 200페이지로 갔다가 다시 50페이지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동안 기존의 맥락을 붙들고 있는 것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이퍼텍스트는 읽기를 위한 구조가 아닌 하나의 정보를 얻기 위한 탐색 트리에 불과하다. 프로그램 코드 역시 하이퍼텍스트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 구조의 장점은 지도(map)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 세부적이며 최종적인 이해는 순서도(flowchart)와 같은 선형적 차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이퍼텍스트 세계에서는 읽는 대상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점점 감퇴된다. 근래 전자책이 많이 보편화되었는데 전자책도 다르지 않다. 몇 백년된 고전도 전자기기로 옮겨지고 웹사이트와 연결되면 하이퍼텍스트화되고 만다. 종이책의 차분함은 사라지고 인터넷의 산만함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웹에 올라오는 짧은 글도 보기 힘들어하는 이 시대에 고전을 읽는 것은 면벽수행과 다름없는 고행이 되었다. 뉴욕대학교 교수 클레이 셔키는 이에 대해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고전이라는 것은 애당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긴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로 이제껏 지속되어 온 우리의 오랜 문학적 습관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생활하는 데에 따른 부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고전이라는 게 생겼고 사람들이 고전을 읽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머지않아 고전, 아니 책이라는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남들과 마찬가지로 생각이라는 것은 기계에게 맡기고,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과도한 데이터들과 늘어가는 기술과 도구에 대한 의존성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것들은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시끄러운 소음의 한복판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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