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제하는 세상
요즘 AI만큼이나 핫한 키워드가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가상의 유니버스를 말한다. 닐 스티븐슨의 SF소설 <스노크래시>에서 유래했다. 2009년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영화 <아바타>가 히트할 당시만 해도 메타버스는 영화적 상상력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이 발달하면서 관련산업도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단순한 사이버세계와의 차이점은 참여자들이 그 세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있다. 2018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메타버스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다.
영화는 2045년 피폐해진 미래사회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환경이 파괴되고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세계는 부유층과 빈곤층이라는 두 계급으로 나뉜다. 빈민가에 사는 10대 소년 웨이드는 가상현실 게임인 '오아시스'에 접속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웨이드가 존경하는 사람은 오아시스를 창시한 괴짜 개발자인 제임스 할리데이다. 할리데이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 안에 숨겨둔 3개의 열쇠를 찾는 자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그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할리데이가 남긴 열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영화가 늘상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앞길을 막는 적이 있다. IOI라는 거대기업의 목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업적 이윤을 얻는 것이었다. IOI는 할러데이가 남긴 열쇠를 찾음으로써 오아시스를 소유하고 좌지우지하려 한다. 비싼 아이템으로 무장한 거대기업 IOI의 캐릭터들에 비해 주인공들이 가진 힘은 변변치 않았다.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강점은 그들이 단순한 게임의 구매자가 아닌 오아시스라는 유니버스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는 것이었다.
메타버스는 매트릭스와 같은 세계관을 지향하지 않는다. 함께 만들어 나가는 대동세상은 모두의 이상향이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이 팍팍하면 할수록 메타버스는 이루지 못하는 꿈의 공간이 된다. 시중에 넘쳐나는 가상현실게임이나 포켓몬고 같은 증강현실게임이 메타버스인지 아닌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메타버스는 구성원들이 그 세계의 규칙을 정하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상현실과 다르다. 이런 특징에 가장 잘 부합하는 현재 메타버스계의 선두주자로는 로블록스가 있다.
로블록스(Roblox)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이다. 로블록스는 2010년대 하반기부터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오고 언택트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더욱 커졌다. 어린 시절 내가 만든 대로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희열을 느꼈던 것처럼 전세계의 수많은 어린이가 로블록스에서 컨텐츠를 만들고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영리적인 회사에 종속된 플랫폼이지만 그 구성원들이 그 플랫폼을 성장시키고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나온 '오아시스'와 같은 메타버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게임 강국인 우리나라에는 이미 수많은 온라인 게임이 있고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게임들이 쏟아진다. 단순한 온라인 커뮤니티로 그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메타버스가 될 것인지는 어떤 창의적인 정책과 아이디어가 존재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점점 고도화되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에 대한 부작용을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 그것들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 우려의 가장 큰 부분이다. 가상현실이 현실 도피 수단으로만 전락한다면 그들의 우려는 옳다. 현실과 완전히 괴리될수록 가상의 세계는 엑스터시와 같은 마약류와 다르지 않게 된다. 게임과 같은 가상현실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도 마찬가지다. SNS의 맛있는 음식 사진과 리조트에서의 휴가 사진이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가상현실과 SNS의 멋진 사진은 키치(Kitsch)다. 키치는 쉽게 말해 가짜다. 원래 키치는 고급문화를 모방하는 저급함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완전히 가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진짜도 아니다. 화장한 채로 자고 일어나는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같다. 눈곱은 찾아볼 수 없고 방금 화장한 듯 뽀샤시한 여주인공의 얼굴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멋진 펜션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는 사진에는 눈을 맵게 하는 쾍쾍하고 뜨거운 연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네이버제트가 운영하는 증강현실 아바타 서비스인 제페토에 나오는 내 아바타의 피부는 언제나 매끈하다. 어젯밤 고민으로 잠을 못 잤다고 해서 내 아바타의 피부가 칙칙해지지 않는다. 키치는 나의 시선이 아닌 남의 시선이다. 키치에는 서정이 없고 서사는 각색되어 있다. 서정은 주체적으로 느끼는 고유한 감정이고, 서사는 진짜 줄거리다. 진짜 나의 사연이고 진짜 나의 감정이다. 키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실제 삶으로 오도하기 때문이다. 내 삶은 구질구질한데 SNS로 보는 친구의 모습은 화려해 보이기만 하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타자의 감정 - 즉 키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 행복을 키치에서 찾으라고 광고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키치가 아니다. 장자는 호접몽을 꾸고 난 이후 나비가 자신인지 자신이 나비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지만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가상을 제대로 즐기려면 현실과의 접점 또한 놓지 않아야 한다.
되짚어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판타지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깜깜한 영화관에서 잠시동안 남의 인생을 살 수 있었고, TV가 없던 시절에도 소설과 무협지를 통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과 연결되었고,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다시 현실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상상력이 시대를 선도한다는 것은 증명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을 자유롭게 상상했고, 그 상상력은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 공상과학영화나 과학소설에서 접하던 것들이 계속 현실화되고 있다. 메타버스와 가상현실은 무한한 상상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만들어지게 될 기술의 가치는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 것이다. 가상현실 속의 부캐(보조 캐릭터)가 아닌 본캐(본래 캐릭터)로 현실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가상현실과 메타버스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