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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Sep 25. 2023

커리어 패스

커리어패스는 직업적인 포트폴리오를 말합니다. 연관성 있는 직무들이 이어져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패스(path), 즉 길과 같이 취급되지만 사실 우리는 어떠한 이정표(마일스톤)에만 관심을 두기 마련입니다. 단지 길이라는 것은 그 이정표까지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거죠. 이정표까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과정으로서의 관념은 사라지고, 기필코 도달해야 하는 결승선 내지는 달콤한 보상과 같은 결과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이과적 재능이 전혀 없는데,  한문 선생이 싫어서 반항심리로 고교시절 이과를 선택했습니다. 대학 가서 그 한문 선생을 볼 것도 아닌데 철부지같은 결정이었죠. 덕분에 한문보다 100배 정도 더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수능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갔고 전공학과 역시 점수에 맞춰서 선택했습니다. 당시 지원 가능한 두 개의 전공학과 중에서 선택을 고심했었습니다. 두 개의 원서를 모두 써 놓고 어떤 것을 제출해야 할지 전날까지도 고민하고 있었죠. 저녁식사로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식사 도중 원서 하나로 김치국물이 크게 튀었습니다. 아뿔싸, 예기치 못 한 사고였지만 그 사고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김치찌개 국물이 제 전공을 결정해주었습니다.


학사경고를 아슬아슬하게 면한 다음 군 생활 2년 후 복학했습니다. 매일 도서관에서 살면서 기를 쓰고 고꾸라 쳐박혀 있던 학점을 하드캐리해서 다들 좋다고 하는 대기업에 겨우 들어갔습니다. 과거 이력 대충 보고 연말 보너스 많이 나온다는 소리에 혹해서 사업부를 선택했고, 직무 역시 친해진 선배 따라 결정했습니다. 금융위기가 도래하던 2008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벤처회사에 합류했다가  불타는 청춘의 10년을 날려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뒤돌아 보면 스스로 제대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인들은 열이면 열, 다 바보 같은 결정들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길들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고생한 덕분에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글 짓기 대회 한번 안 나가본 제가 어줍지 않지만 <마음편지>라는 것을  쓰고 있는 것도 다 그 잘못된 길을 걸어온 덕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걸어온 길들이 정녕 잘못된 길이였을까요?


지난 1년 넘는 시간 동안 회사에서 주니어 개발자들 면접을  많이 봤습니다. 요즘 주니어들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커리어패스에 대한 생각이 확고한 편입니다. AI, 딥러닝, 빅데이터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면 죄다 프론트엔드, 백엔드 개발이죠. 대부분 요즘 통용되는 기술 트렌드들입니다. '그 길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겠습니다'라며 철벽을 치는 주니어들도 있습니다. 신념은 확고합니다만,  그 판단과 선택의  기반은 대부분 부실합니다. 면접을 보면서 그런 것들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진짜 본인의 생각인지 의아할 때가 많았습니다. 진짜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위로부터 만들어진 선택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니어들의 선택과 판단이 수십년전 제가 했던 선택들과 과연 다른 것들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더군요.


사실 선택보다는 선택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잘못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선택이 정말 잘못되었다면 되돌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거나, 선택하고 난 이후에도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현재 선택으로 얻어낸 것들을 잃을까 두려워 다른 가능성들을 외면합니다. 모든 선택에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그 확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이후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한번 선택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선택이 정말 잘못되었다면 다시 선택할 시간이 옵니다. 삶은 무수한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점과 점을 잇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군데 군데 떨어져 있던 점들이 언젠가는 이어졌고, 그게 길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각각의 점은 선택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스냅샵과 같습니다. 점과 점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선택과 선택들 사이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잡스는 점과 점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터득했습니다.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점과 점이 이어지면 길이 만들어집니다. 무용하게만 생각되었던 것들로부터 유용함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길이든 완벽하게 잘못되어서 뒤로 돌아가야 한다는 확신이 있지 않는 이상,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엉거주춤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걸으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을 보며 조급해 하지는 말자 되뇌여 봅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한 걸음을 충실히 내딛으려 합니다. 길이란 곧게 뻗은 것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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