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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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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Dec 24. 2018

#47 지하철 기다림의 짜증

천명天命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생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정시에 오기로 예정된 무생물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참아내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난 매일 그 무생물과 지하철역에서 만난다. 오늘 퇴근길도 짜증이다. 금정역 4호선에서 내리는 순간, 1호선 지하철은 매정하게 문을 닫고 떠나버렸고,  이후 20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지하철이 연착되어 죄송하다는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런 사소한 일에 그만 짜증내야지 하고 체념하지만, 30분을 넘게 기다려 올라탄 지하철 뒤에서 밀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입에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사람 기다리는 것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데, 지하철이나 버스 기다리는 것은 왜이리도 끔찍히 싫어하는 지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사람은 그럴수 있다고 가정하고 교통시스템과 같은 무생물은 항상 정해진 바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은 항상 순환하고 내가 숨쉴 공기는 항상 여기에 있고, 내가 마실 물은 고갈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고체계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일어난 천재지변에 끔찍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디 하소연할데가 없다. 엄청난 쓰나미로 모든 것을 잃었던 타국의 사례까지 갈 것도 없이, 몇년전에 대구지역에 일어난 지진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하늘에 대고 삿대질해봤자 복창만 터진다. 20년전 IMF때 잘 나가던 사업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던 사람들, 불과 몇년전 금융위기때 경제적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터진 사건 사고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진다. 왜 나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정해진대로 움직일 것이라 마냥 생각했던 일상이 무너지게 되면 하늘에 분노하지만 결국 이는 체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천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니 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찾아 기도를 드리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려 천명을 바꿔달라고 호소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불과 몇 백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신분으로 그 서열이 정해지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그 서열이 나뉘긴 하지만, 절대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였다. 천민으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었다.  운명을 거부한 사례는 천고의 위인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우리나라의 백정 모두 태어나보니 그들의 운명은 난데없이 일어난 천재지변이었다. 순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의 철퇴를 맞으며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숙명같은 굴레, 갑자기 닥친 마른 하늘의 변고 모두가 하늘의 뜻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는 공자가 주장한 천명론에 반기를 든다. 순자는 하늘이 정해준 본성이 있고, 그 천명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천天이 인간의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순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위대하다고 사모하는 것과, 물자를 비축하여 그것을 잘 마름질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늘에 순종하여 그것을 칭송하는 것과 천명을 마름질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순자는 하늘을 칭송하지도 말고, 원망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떠한 굴레안의 범위가 아닌 최대한의 범위로 확장 가능하다.  순자는 천명을 거부하지만 천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천명이 수동적 체념으로 흐르는 폐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천명을 거부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원망이 아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인정, 그 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이자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였던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모든 가족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언제나 죽음의 두려움과 가혹한 현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에서는 하늘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그런 생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하루를 만들어 나간다. 죽음에서 삶을 찾고자 했던 그의 경험은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로고 테라피의 창시로 이어진다.


주어진 현실에서 어떤 일들을 어떠한 선까지 할 수 있을지 결정하고 행하는 것은 개인에게 달린 지혜의 영역이다.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난 이후의 대처 역시 개인에게 달린 지혜의 영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나누는 것 역시 지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인내와 용기다.  


'다음에 지하철이 늦게 온다면 과감하게 지각한 지하철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고고하게 보내야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이런 짧지 않은 글을 써야 하다니! 내게 주어진 천명은 소심한 일상 속에 보다 큰 것을 찾는 일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며 -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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