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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Jan 07. 2019

#53 첫 출장 - 1

영국 사우스햄턴(Southhampton), 전쟁의 시작

비행기가 착륙을 위한 하강을 시작하는 순간 좌석손잡이를 잡은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내 인생에서 창공으로의 첫 이륙을 겪은지 10여시간이 지나 이제 첫 착륙을 예비하는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푸른 숲과 빨간 지붕들이 동화처럼 펼쳐졌다. 진짜 이국에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첫 출장이자 첫 해외여행이자, 처음으로 탄 비행기였다. 미리 준비해간 빼곡한 주의사항을 머릿속에 되뇌이며 입국수속을 마치고 런던 히드로 공항 대합실에 나왔다. 먼저 출장나와 있던 강대리가 공항으로 픽업을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직 강대리는 공항에 오지 않은건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를 찾아 대합실 의자에 앉아서야 고조되었던 긴장이 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좀 여유를 찾고 다리를 꼰 채 마치 여행자처럼 무심한 척 여기 저기를 두리번 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냄새, 그리고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백인들과 흑인들 속에서 단추구멍같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이곳 저곳을 희번덕거렸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겨우 20분 정도 지났을 뿐인데 난 금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났다. '왜 안오는 거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시간이나 지났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자칫하다가는 국제미아가 될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그래, 전화를 한번 해보자' 공중전화부스를 찾아 출국전에 적어놓은 호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신호음이 잠깐 이어진 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자의 얘기들 듣는둥 마는둥 하며 다짜고짜 물었다.


"May I speak Mr.Kang?"


나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계속 뭐라고 주절거렸다. '내 영어발음이 좋지 않은건가?' 외국에서의 첫 실전영어 구사이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여자의 얘기를 자세히 들어봤다.


".....Wrong number....Call.....again...."


여자의 목소리는 기계음이었다. 내가 알아들은 단어를 조합해보면 잘못된 번호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몇번을 다른 조합으로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번호가 잘못된 것인지, 전화 거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중전화를 앞에 두고 전화를 어떻게 거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비련한 내 뒤로 급기야 줄까지 늘어섰다. 등이 따가워지고 있었다. 결국 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대합실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런던 히드로 공항이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나?', '다른 터미널로 가봐야 하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만 할 뿐 정작 뭘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픽업만 생각했기에, 호텔로 찾아가는 방법은 전혀 알아놓지 않은 상태였다.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지도 보고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길을 찾아야 했던 시절이다. 목적지는 런던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사우스햄턴(Southhampton)이었다. '그래, 호텔주소도 있는데 한번 찾아가보자'  비장하게 캐리어를 끌고 대합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활로를 모색중이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강대리였다. 


"많이 기다렸냐? 아씨, 차 엄청 막히데"


강대리 이 인간이 이렇게 반가울줄이야. 만나기로 약속한지 근 2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의 뒤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졌다. 


새로운 출발과 첫 경험은 언제나 가슴 떨리며 온몸에 다소의 긴장을 동반한다. 첫 입사, 첫 프로젝트, 첫 출장 - 비록 그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하더라도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가슴의 진동과 어깨의 긴장감이 아릿하게 전해져온다. 무엇이든 일단 시작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익숙해진 삶의 패턴은 관성이 된다.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여행은 일상이 된다. 그리고 일상이 관성이 되면 지루해지는 것은 금방이다. 개발출장은 대부분 한 곳에 가서 오래 머물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컨퍼런스나 전시회 참석, 혹은 영업을 동반한 바이어 미팅을 위한 출장이 아닌 나머지 출장의 목적은 실제 필드에서 개발을 해야 하거나 제품을 인증받기 위해서, 또는 제품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장기전투다.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출장도 일상이 되지만, 출장은 관성으로 고착화되지 못한다. 대부분 출장의 마지막날까지 관성이 아닌 익숙한 낯섬으로 남는다. 


여행은 낯선 것들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그 본질이며 의식적으로도 익숙함을 거부해도 무방하지만, 출장은 낯선 곳에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익숙함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업무적 성과를 위한 필연적 프로세스다. 단시일내에 외국어가 일상이 되어야 하고, 오늘 처음 본 외국 회사 엔지니어에게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생경한 현지 회사 사무실 책상이 내 자리가 되어야 한다. 먼 옛날 전쟁을 위해 길을 떠나는 병사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전투를 하기전 급한 끼니를 채우고, 막사를 지어 잠을 청하고, 해가 뜨면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행군을 계속해야 하는 병사들 중 그 여정을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을까? 몇몇 배포 큰 이들을 제외하고는 주위 풍경은 보일리 없고, 끝없이 뻗은 그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전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만이 있지 않았을까? 전투에서의 승리와 생존을 위해서는 전장의 낯선 풍경들을 애써 익숙함으로 만들어야 했다. 전장이 끝없는 생경함이 되는 경우 스스로의 목숨은 지킬 수 없었다.


출장도 여행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출장을 원정 전투에 빗대는 것을 비약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몇몇 출장은 그렇다. 하지만 개발 출장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짧은 파견근무다. 반복되는 이직이다. 바뀐 주위상황에 적응하며 필연코 체류중에 성과를 내야 하는 단두대 매치다. 약간은 달콤한 여행의 풍미를 기대했던 나에게 첫 출장은 전쟁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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