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수안이가 리듬체조를 배운 지 2년. 시작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미미했는데, 점점 창대해지고 있다.
요즘은 1주일에 네 번을 가고, 한 번에 3~4시간은 기본이고 주말엔 7~8시간을 연습한다. 가족들의 삶도 함께 바빠졌다. 아이들을 위한 물리적인 수고라면 앞뒤 따지지 않는 아내는 딸과 함께 집과 학원을 두 번씩
왕복하며 차에서 2시간 이상을 보낸다. 7살 아들은 엄마가 없는 동안 가끔 집에 혼자 남아 TV를 보기도 하고, 장모님은 그 7살 아들을 돌봐주기 위해 시시때때로 호출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7살 아들은 이웃집
엄마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나의 삶에 끼치는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과감히 생략한다.
리듬체조에 드는 비용도, 좀처럼 늘지 않는 나의 수입을 고려했을 때 쉽게 넘길 만큼 가볍진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딸을 제2의 손연재로 키우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수안이도 선수를 꿈꾸진 않는다. 단지 수안이의 목표가 있다면 10월로 예정된 서울시 교육감배 대회에서 입상하는 것.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뜨거운 축하를 받으며 상장과 메달을 받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그런 소박한 수안이의
꿈을 응원해주는 것, 딱 그 정도의 생각으로 리듬체조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안이가 리듬체조를 배움으로써 생기는 ‘교육감의 상장과 가족의 수고’ 두 가치의 등가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교육감배 대회에서 받는 상장의 가치가 작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가족이 그것을 위해 들이는 수고가 너무 컸다. 그리고, 몇 번의 대회를 참관한 터라, 꼭 수안이에게 10월에 어느 멋진 날이 올 거라 확신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상을 받지 못한다면, 아이가
받을 상처와 그 상처를 보듬기 위해 준비해야 할 각종 아이디어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결론은 막아야
했다. 아내에게 힘들게 얘기를 꺼냈다. 처음엔 “당신도 하루 2시간씩 운전하느라 힘들지 않냐고?” “아이가
이제 고학년이 되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영어나 수학을 배우러 다녀야 하지 않냐고?”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돈도 좀 많이 드는 것 같다고.” 아내에게 돌아온 답변은 심플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딸에게
얘기하라고.”
결론은, 여전히 딸은 아주 열심히 리듬체조를 배우고 있다. 하루 7~8시간 운동을 하고 와도 힘들다거나
피곤하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운동하러 갈 때나 마치고 돌아올 때나 언제나 표정은 밝다. 활짝 핀
벚꽃처럼 환하다. 결론이 이렇게 난 이유는 내가 ‘리듬체조를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그 얘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안 했기 때문이다. 얘기를 하지 않기로 내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수안이가 리듬체조를 다녀서 얻는 가치와 우리의 수고 사이에 등가가 성립된다고 내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바로 수안이의 환한 표정에 있었다. 나는 전에도 아이가 리듬체조를 하러 갈 때나,
하고 올 때나, 집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 매달려 있을 때나, 두 번의 실패 끝에 처음으로 상장을 받았을 때나, 기다리던 유니폼을 처음 입었을 때나, 새 작품을 받았다고 들떠서 얘기할 때나 수십 번, 수백 번 아이의 환한 표정을 봤지만, 그 표정 속에 묻어났던, 아니 철철 넘쳐났던 아이의 행복감을 깨닫지 못한 바보 같은 아빠였던 것이다.
나는 11살 때 무엇이 행복했을까? 11살 아이들 가운데 수안이 같은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아이가 짓는 환한 웃음을 난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이런 내 생각이 다시 흔들릴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수안이의 ‘까르페디엠(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오늘을 즐겨라’)을 응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