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수안이는 취미로 리듬체조를 배운다. 추석 때마다 TV에서 하는 아이돌 그룹 체육대회 프로그램에서 좋아하는 가수가 하는 걸 보고 시작했다. 아직도 아이돌 가수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는 딸의 꽤 현실적인 준비인 셈이다.
가끔은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리듬체조 선수가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딸은 참 열심히 한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학원에서 또 한 번은 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배운다. 집에서도 틈만 나면 다리를 옆으로 찢고 위로 뻗고, 동시에 허리를 뒤로 꺾고 앞으로 접는다. ‘거미’ ‘무지개’ 이런 게 동작의 이름인데 볼 때마다 신통방통하다.
그런데 키에 비해 길고 가는 팔다리와 유연함을 무기로 ‘취미반 리듬체조계’에서 승승장구하던 딸에게도 고비가 찾아왔다. 바로 시합이다. 경험 삼아 나가보겠다고 신청을 했는데, 막상 대회장에 가보니 딸과 비슷하게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수안이의 출전까지는 두 시간 남짓. 눈으로는 아이들의 놀랍고 예쁜 동작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머리로는 지나치게 상업화된 조기 교육과 냉혹한 경쟁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떠올렸다.
그리고 연습에 열중인 아이들 사이로 수안이가 때론 또렷하게 때론 흐릿하게 내 시야에 두 시간 내내 머물렀다. 디자인은 별로지만 성능은 뛰어나 평균 시력 1.2를 자랑하는 내 눈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한 번도 쉬지 않은 채 2분 남짓한 프로그램을 무한 반복하면서 말이다. 긴장했던 거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 계속 연습을 했던 건데,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했고, 왜 저렇게 노력을 할까 안쓰러웠다.
드디어 딸의 순서. 주책없이 마음이 두근거렸다. 조금 더 솔직히, 그래도 좀 더 잘하기를 바랐다. 조금 전까지 지나친 경쟁을 비판했지만, 딸이 노력한 만큼, 아니 ‘노력한 것보다 살짝 더 좋은 성적을 내서 막 좋아했으면 좋겠다’라는 데까지 생각이 머물렀다. 그리고 내 눈엔 충분히 잘한 것처럼 보였다. 연기를 마치고 나오는 딸에게 “수안아, 잘한 것 같아?”라고 물었고, 딸도 ‘어, 잘한 것 같은데 “라고 답했다.
순위가 발표됐다. 3학년 19명 가운데 9등까지 상장을 줬는데,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점프할 때 힘이 조금 떨어졌던 게 살짝 마음에 걸렸는데, 분명 나와 비슷한 수준의 시력을 보유한 심사위원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눈치 없이 프로정신을 200% 정도 발휘해서 너무나 정확하게 감점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10분쯤 지났을까 와이프가 “수안아, 울고 싶으면 울어” 이 열 글자가 차 안에 다 퍼지기 전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참 서러웠고, 서글펐다. 이럴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말, “괜찮아, 열심히 했잖아. 그럼 된 거야” “다음에 나가서 더 잘하면 되지 뭐” “넌 처음 나간 거잖아, 다른 친구들은 다 여러 번 나온 것 같던데” “아빠 눈엔 수안이가 제일이었어” “너는 다른 것도 잘하잖아. 세상은 공평한 거야” 등등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아마 이 얘기를 차례로 두 번씩은 다 했던 것 같다.
수안이가 제일 좋아하는 토마토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었고, 집에 와서 몇 시간 지나서 수안이 기분도, 내 마음도 풀렸다. 세상 일이 노력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모두 다 되지는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런 일이 앞으로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는 걸 조금은 느꼈을 거다. 어쩌겠는가? 앞으로 그럴 때마다 오늘 차 안에서 했던 교과서 같은 얘기를 다시 반복하는 수밖에. 그리고 함께 맛있는 걸 먹고 털어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