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열면 입이 닫히나?】

by 섬돌


나에게 꼰대는 끊임없이 자기 말을 하는 상사였다. 회의를 하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야기 하라고 하고 이내 본인에게서 기다림과 끈기를 팽개친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혼자 떠든다. 그의 무용담은 경험이라기보다 지루한 서사시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기보다 그의 말을 받아칠 준비를 하는 꼰대. 그들은 입 다물고 듣는 것이 무척이나 곤혹스런 인내의 과정이다. 무수한 성공경험은 보태지고 다듬어져 영웅담으로 변해있고, 본인은 전설이기를 원한다.


최근 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오랜만의 술자리와 반가운 얼굴들이어서인지 서로 이야기 꽃이 피고, 술잔 돌아가는 속도가 급행이다. 몇 순배 돌고나니 얼큰히 취하고 2차를 외치며 우리는 호프집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그때부터의 기억이 가물가물 중간이 빈다. 술을 급하게 마신 탓이겠지만 더 끔찍한 것은 엄청나게 떠들던 그들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꼰대가 되어 있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내 기억 속에 내가 떠들고 이야기 하는 모습은 선명한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억이 흐리다. 듣는 기능이 마비된 말하는 로봇이 되어버린 영상 속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얼마나 나의 성공경험을 잘난 척 떠들었을까? 후배들 앞이니 내 말을 막는 놈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루함을 참으며,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날 기억 속의 내 모습은 과거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상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입 못지않게 지갑도 열었다는 증거의 카드전표를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고 했던 옛 선배들의 이야기가 이제야 가슴에 파고드니 분명 나도 완벽한 꼰대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아니 이미 갖추었다. 언제부턴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고 있다. 듣는다는 것이 힘이 든다. 듣고 있으면서 다음에 내가 할 말도 생각한다. 본능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싸구려로 변한 얄팍한 지식과 잘 포장된 경험으로 무장된 입이 근질거린다. 그래서 입을 닫는 것이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도전이 되었다.


‘나이 먹으면 다 그래.’라는 선배의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안 그런 선배들의 모습이 난 언제나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선배들을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배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리 있게 조언하는 선배의 모습을 닮고 싶었다. 나는 오늘도 술자리를 갖는다. 오늘은 아마 내가 막내일 듯싶다. 나는 오늘 꼰대의 향연을 목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반면교사(反面敎師)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설마 지갑은 선배들이 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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