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1954년에 탈고한 「구라중화(九羅重花)」에서도 자본주의 시대에는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예술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다원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라중화를 아름다운 정신적 예술을 상징하는 ‘꽃’이나 먹고사는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물’ 그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구라중화를 “영롱한 꽃송이”, “거룩한 발자국 소리”처럼 정신적 예술의 대상으로 그려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압력을 이겨내고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물질적 대상으로 그리려고 한다. 시인으로서 물질적 생활을 긍정하는 것이 “이 시대를 진지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라면서 “동요 없는 마음”으로 이를 추구하면서 “무량의 환희”에 젖는다. 그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문명을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적 정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라중화를 “누구의 꽃도 아닌 꽃”,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물질적인 생활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정신적 존재이므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비록 예수가 살았던 정신적 공간인 “골고다의 언덕”이 아니라,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 있을지라도 “숨어 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고 주문한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전통적 정신를 추구하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구라중화가 원래 “물이 아닌 꽃”, 즉 물질적 생활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정신적 존재이므로 “생사의 선조(線條)”를 끊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끊어야 할 줄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 가쁘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자신은 물질적 생활을 초월할 수 있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을 끊지 못하고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첫머리에서 구라중화를 아름다운 정신적 예술을 상징하는 ‘꽃’이나 먹고사는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물’ 그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듯이 구라중화를 그리는 예술가도 생활과 정신 어느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화가=시인으로서 물질적 생활이나 정신적 예술 어느 하나의 진한 색깔이 아니라, 엷지만 양극단이 “결합된 색깔”을 추구한다. 그리고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설움”과 정신적 예술을 추구하는 “힘찬 미소”가 서로 공존하면서 긴장하는 “관용과 자비”의 “엷은 세계”가 진정 “자유로운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은 정신적 예술을 추구하는 “생기”와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신중”을 “한 몸에 지니고” 그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이중의 봉오리”를 맺고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라고 다짐하는 것도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예술이라는 두 개의 봉오리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정신적 예술을 죽이고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다가도 다시 물질적 생활을 죽이고 정신적 예술을 추구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무한한 긴장을 유지하겠다는 다원주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글라디올러스(Gladiolus)를 구라중화(九羅重花), 즉 “아홉 개의 비단 같은 꽃잎이 거듭나는 꽃”으로 부르는 이유도 꽃 위에 꽃이 겹쳐져 피어 있는 “이중의 봉오리”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예술 사이의 긴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구라중화는 “자유인, 단독자 혹은 혁명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예술과 물질적 생활 사이에서 긴장하는 다원적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그가 1954년 11월 24일자 일기에서 “누가 무엇이라고 비웃든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애인이, 벗들이 무엇이라고 비웃고 백안시하든 그것이 문제일 까닭이 없다. 이 산만한 눈앞의 현실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미라와 같은 나의 생활 위에 살과 피가 한데 뭉친 거대한 걸작을 만들 수 있느냐?”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뒷받침 된다. 이 시에서도 그는 ‘살과 피가 한데 뭉친 거대한 걸작’, 즉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살’과 정신적 예술을 상징하는 ‘피’를 모두 긍정하면서 온몸으로 살아가겠다는 양자포괄적 다원주의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