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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Jan 24. 2023

민족주의자 김수영 : 더러운 향로

김수영은 1954년에 탈고한「더러운 향로」에서 민족의 전통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감추겠다고 덧붙인다.


그는 시작 노트라고 볼 수 있는 1956년 2월 9일 일기에서 인간은 “나무 위에서 떨어진 새”처럼 “처참한 추락”으로 인해 “신(神)”이 가슴에서 사라지고 “시체와 같은 그림자”를 저마다 지니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로 보아 그림자를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을 시체로 만드는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처럼 용감하게 민족과 인류의 전통적 정신를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에서부터 자신을 감추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적”, “벗”, “땅”에 갇혀 있는 편협한 민족주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이라는 인류적 차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고궁”에 있는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愛兒)”를 찾은 듯이 “우는 날”, 즉 분단으로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민족통일의 날이 오더라도 자본주의 시대에 물질적 욕망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고독”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힌다. 앞으로 민족이 통일되면, “철망을 지나는 비행기의 그림자”처럼 전쟁으로 증명된 파괴적인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민족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더니스트들의 전통 지향보다 “좀 더 내적으로 육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도 민족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 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향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그림자인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향로도 전통과 역사 자체를 절대시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 시대에 인간성 회복이라는 인류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향로와 같이 있을 때 향로도 살아있고, 자신도 소생한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개인적인 물질적 욕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향로를 추구해야 소생할 수 있는 것처럼, 향로도 그의 그림자인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서 인류적 차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그가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느냐고 거듭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은 파괴적인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아까운” 길이자,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는 “더러운 길”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후 「거대한 뿌리」에서 다시 제시되는 것처럼 우리 전통이 서양의 자본주의 문명에 비해 가난하고 전근대적이지만 영원한 “인간과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민족의 전통을 추구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는 더러운 길이지만, 민족통일이 인간성 회복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1961년의 산문 「저 하늘 열릴 때」에서 “통일”이 되어도 시 같은 것이 필요할까 하는 문제라고 묻고는 “더 필요하다”고 스스로 답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세계적인 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시”,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힘차고 좀 더 신경질적이 아니고 좀 더 인생의 중추에 가깝고 좀 더 생의 희열에 가득 찬 시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도 통일이 되어 “정신상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1968년의 산문「반시론」에서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듯이 민족통일은 “종점”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가 1965년의 산문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묘정의 노래」에 “무슨 불길한 곡성 같은 것이 배음으로 흐르고 있다.”라고 자평하는 것도 과도한 민족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의 김수영은 민족의 전통만을 강조하는 국수주의를 배제한 열린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향로」(1954)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 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위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愛兒)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 보다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 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 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 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가까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 보는

이 더러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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